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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수덕사 대웅전

蔥叟 2018. 4. 19. 08:15

예산 수덕사 대웅전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德崇山)은 북으로는 가야산(伽倻山),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중심부에 서 있다. 이 덕숭산 자락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라고 중국사서(史書)인 '북사(北史)' , '수서(隨書)', '주서(周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 정사(帝釋精寺) 등 12개가 전하지만 현재까지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수덕사 뿐이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 (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앞면 3칸, 옆면 4칸의 단층건물로, 지붕은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얹었다. 기둥 위에만 공포(栱包)를 올린 전형적인 주심포(柱心包)계 건물로, 11줄의 도리를 걸친 11량(梁)의 가구(架構)를 갖추었다. 건물은 곱게 다듬은 긴 댓돌을 여러 겹으로 포개어 쌓은 높은 기단(基壇)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기단의 좌우에는 건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놓았다. 네모나게 다듬은 주춧돌의 윗면에는 기둥을 받치는 둥근 기둥자리가 낮게 마련되어 있다. 기둥은 둥근 기둥으로, 가운데부분이 볼록한 배흘림의 정도가 뚜렷하지만, 건물 옆면의 가운데기둥은 단면이 네모나다. 기둥 윗몸에는 창방(昌枋)이 둘러져 있고, 네 모서리기둥과 창방이 맞물려 있는 위치에는 앞면과 뒷면 쪽으로만 첨차(檐遮)를 끼워 놓았다. 첨차는 기둥머리 위에 짜인 쇠서[牛舌] 모양의 제공(諸工)을 받치고 있는데, 제공의 끝부분 위에는 짧은 장여를 놓아 외목(外目)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기둥머리 위의 첨차는 뜬장여와 장여, 주심(柱心)도리를 차례대로 받치는데, 뜬장여는 앞면 창방 위의 포벽(包壁)을 가로지르고 있다.

 

한편 옆면의 가구는 건물을 설계할 때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결구(結構)한 모습을 보여준다. 곧 창방 위의 유연한 맞배지붕 처마선 아래에 보이는 박공(牔栱) 부분의 구성은 참으로 일품이다. 협간(夾間) 중에 앞면 쪽에는 외짝의 빗살문을 달아서 안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창방 위쪽의 기둥머리에는 덩굴 무늬인 당초문(唐草紋)이 이어진 파련(波蓮) 모양의 받침을 놓아서 단면이 항아리 모양인 충량(衝樑)을 받았으며, 그 위에는 다시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얹어 고주(高柱) 윗몸에서부터 나온 가로 부재를 받쳤다. 또한 그 위에는 지붕의 무게를 전달하는 동자 기둥을 받치는 보인 우미량(牛尾樑)이 놓여 있는데, 지붕의 무게가 마루보 밑의 우미량에서 대들보 위에 얹힌 우미량으로 전달되고, 다시 파련대공으로 받치고 있는 우미량으로 전달되도록 하였다. 이 우미량의 율동적인 구성은 마루보 위쪽에서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는 솟을합장의 곡선미, 2중량(二重樑)의 중량감있는 곡면(曲面)과 더불어 뛰어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부재 사이의 작은 벽에는 수생화도(水生畵圖)·나한도(羅漢圖)·소불삼례도(小佛三禮圖)·극락조도(極樂鳥圖) 등의 불화(佛畵)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건립된 불교건물의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는 불화는 지금은 모두 없어진 채, 벽은 노란색을 칠한 빈 벽으로 되어 있다.

 

건물 앞면의 3칸에는 모두 3짝의 빗살문이 달렸고, 뒷면에는 양쪽 칸에 창을 설치하고서 가운데칸에는 널빤지로 만든 판장문(板長門)을 두었다. 건물 안의 바닥에는 원래 전돌이 깔려 있었지만 지금은 우물마루가 덮여 있고, 뒤쪽벽의 가운데 고주 사이는 막아서 불화를 그리고 그 앞에 불단(佛壇)을 놓았다. 불단은 3개로, 가운데에 6각형 불단이 높게 자리하고 있으며, 양쪽에는 약간 낮은 4각형 불단이 위치해 있다. 건물 안의 천장은 서까래가 모두 드러난 연등천장이다.

 

1937년에 건물을 뜯어서 수리할 때 '至大元年戊申四月十七日立柱'라 적힌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었다. 이에 의하면, 이 건물이 1308년(충렬왕 34)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었으므로, 건립 연도가 확실한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이 건물의 양식적 특징을 중심으로 고려 중기 내지 후기에 건립된 건물에 대한 편년이 시도되었다. 그 결과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 등이 더 오래된 건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제작 연도가 명확하고 형태미가 뛰어난 한국 목조건축사상 매우 중요한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수덕사 전경

 

▲수덕사 전경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옆면 면분할

 

▲수덕사 대웅전 옆면 면분할

 

▲수덕사 대웅전 옆면 면분할

 

▲수덕사 대웅전 옆면 면분할

 

▲수덕사 대웅전 옆면 면분할

 

▲수덕사 대웅전 옆면 면분할

 

▲수덕사 대웅전 옆면 면분할

 

▲수덕사 대웅전 편액

 

▲수덕사 대웅전 옆면 면분할

 

▲수덕사 대웅전 공포

 

 

 

<2018. 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