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가평리 계서당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지어진 창녕 성씨 집성촌에 있는 종택이다.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계서 성이성(成以性)이 이곳에서 문중 자제들을 가르치고 후학양성에 힘썼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동산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집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 계서 성이성(1595∼1664)이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지었다고 전한다. 아랫쪽 마당 끝에 대문간채를 두고 북쪽 높은 곳에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로 연결된, 정면 7칸, 측면 6칸의 전형적인 ㅁ자형 가옥이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은 대청이고 좌우 2칸은 안방과 상방이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으로 후대에 손을 본 것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다. 사랑채의 당호를 성이성의 호를 따서 ‘계서당(溪西堂)’이라 붙였다. 춘향전의 주인공인 이몽룡의 생가로도 알려져 있다.
사랑채는 후에 넓히거나 다시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쪽 마당 끝에 대문간채를 두고 그 북쪽 높은 곳에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로 연결되어 'ㅁ'자형 집을 이루고 있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비교적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맞은편 높은 곳 서쪽에 중문간채가 있다. 동쪽에는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고, 사랑채 서쪽의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채가 있다. 또한 동북쪽에 따로 담장을 둘러 사당을 배치하였다. 이곳의 안채와 사랑채는 다른 곳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안채는 도장방이 많은 것이 특징이고, 사랑방은 대부분 홑집으로 구성하는데, 이 집은 겹집으로 만들어 안채의 날개집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안채부분은 약간 변형은 되었지만 경북 북부지방 'ㅁ'자 민가의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집으로 주택발달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성이성은 문과에 급제한 후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3차례나 어사로 등용되었을 정도로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성이성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조, 효종, 현종 3대 임금을 모셨다. 그러나 평소 곧은 말을 많이한 탓에 주위의 견제를 받아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왕의 돈독한 신임을 받아 세 번이나 암행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폈으며, 외직으로는 진주, 강계, 창원 등의 고을을 다스렸는데, 강계를 다스릴 당시 기본 세금을 모두 면제해주어 ‘관서활불(關西活佛: 관서지방의 살아있는 부처)’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국문학자 설성경은 성이성이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라는 사실을 문헌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성이성은 소년시절에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 머문 바가 있다. 그가 암행어사로 남원에 출두했을 때 늙은 기생들을 물리치고 홀로 소년시절을 회상했다는 ‘호남암행록’과 그의 4대손 성섭이 쓴 ‘필원산어’에 실려 있는, “술독에 담긴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하는 그의 한시와 춘향전의 이몽룡이 쓴 한시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 그 근거라고 한다.
▲계서당
▲계서당
▲계서당
▲계서당
▲계서당
▲계서당
▲계서당
▲계서당
▲계서당
▲계서당
▲계서당
▲계서당
▲계서당
▲계서당
▲계서당 사당
▲입춘방
▲입춘방
▲계서당 편액
<2017.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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