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한양문화권

한성 백제의 흔적 - 서울 풍납토성

蔥叟 2017. 6. 23. 10:22

한성 백제의 흔적 - 서울 풍납토성

 

한성백제. 백제가 온조왕에 의해 건국되었을 때부터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에 의해 공주의 웅진성으로 천도하기 전 한성(위례성)에 도읍했던 전체 678년 중 493년 간의 백제를 뜻하는 명칭이다. 지금의 풍납토성 안의 모 아파트 뒷쪽 부지가 당시 백제의 수도 위례성의 위치로 추정되고 있다. 그외 몽촌토성 지역도 유력한 후보중 하나인듯. 요즘에는 삼국사기 기록과 종합하여 몽촌토성을 남위례성, 풍납토성을 북위례성으로 보는 학설이 유력하게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사실 일반적 인식과 다르게 백제가 가장 오랫동안 도읍한 곳은 충청도의 웅진성, 사비성이 아닌 한강 이남의 한성(위례성)이었다. 이 때문에 서울특별시의 역사를 조선 한성 뿐 아니라 백제 위례성까지 소급하여 1000년 역사로 삼자고 하는 주장도 있다. 당연히 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포괄하는 이 지역의 중요성은 강했고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무너지고 개로왕이 죽임을 당하자 백제는 일시적으로 멸망했을 정도의 혼란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웅진성으로 천도한 이후 백제 왕실의 권력은 한성 시절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약화되었다. 한성에 도읍했던 최후의 군주는 개로왕이다.

 

한성백제 시대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곳이 바로 풍납토성이다. 풍납토성(風納土城)은 정식 명칭은 서울 풍납동 토성(서울 風納洞 土城)이다. 풍납토성이라는 명칭은 풍납리일대의 토성이라는 뜻에서 온 것이며, 정확히 조선시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고산성(古山城)" 이라고 나와 있다. 이를 보아 중세인들도 백제의 오래된 성곽이라 추측한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이 정식적으로 1900년대 학계에 처음 발견된 것은 1925년의 대홍수 때이며, 지난 1997년 아파트 공사를 계기로 다량의 백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유적이 한성 백제 시대(온조왕 ~ 개로왕)의 이른바 하남위례성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백제 때의 하남위례성의 북성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1900년대 정론적인 학계에서의 발견은 1925년 홍수 때로, 당시 풍납토성은 한강의 의해 서벽이 유실됨으로써 발견, 조사되었다. 이후 1963년 성벽 둘레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성의 내부는 사유지로 남아있다. 1964년 시굴조사에서 백제 건국초기의 철기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다. 1997년 아파트 공사를 하던 중 유물이 발굴되어, 발굴 조사를 하였다. 문화재청과 사업자와 주민들 사이에 보상비 문제로 갈등이 생겼고, 2000513일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주민들이 굴삭기로 발굴 현장을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현재 동벽 1.5km, 남벽 200m, 북벽 300m로 둘레가 약 2.7km가 남아있지만, 선문대학교 고고학과 이형구 교수가 측량한 결과, 풍납토성은 본래 둘레가 약 3.5km, 밑변이 30~40m, 높이가 15m, 넓이 약 26만평으로, 현존하는 토성 중 대한민국에서 최대 규모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이 성이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에 축정된 것이라고 20004월에 발표했다. 성의 규모와 축성 시기를 보았을 때 당시 이 성을 축조한 백제는 이미 상당한 규모의 중앙집권국가 체제를 수립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해석하고 있다.

 

이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중국 은나라의 수도 유적이다. 9.9m이상의 성벽을 가진 9km의 유적은 1만 여명이 일년에 330일씩 18년 이상을 작업해 축조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에 비추어보았을 때 풍납토성도 그만한 인력을 동원하여 장기간 시간을 들여 축조할 수 있는 국가와 그만큼 막강한 사회ᆞ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도자가 설계ᆞ지휘한 것임을 방증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가량 남아있다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성벽은 돌이 없는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는 방식으로 고운 모래를 한 층씩 다져 쌓았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는 곳이 많으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다. 동쪽에는 4곳에 출입문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있다풍납토성은 백제만의 독자적인 설계방식이 돋보임과 함께, 당시 중국의 축조기법이 여러 반영된 것을 보아, 당시 백제가 중국과 활발히 교류했을 정도로 해상무역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풍납리식 민무늬토기·신라식 토기들과 그물추·물레·가락바퀴(방추차기와 등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풍납토성 지역권은 백제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도성인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와 방어성으로 보는 두 가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더욱 연구·조사 되어야 한다. 그러나 초기 백제의 중요한 성으로서 당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며, 주변에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과 관련되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 있는 곳이다.

 

1925년 대홍수 때 청동제 초두가 2개 발견되었으며, 이후 토기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1996년 이후 발굴로 토기, 그물추, 물레, 가락바퀴,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1999년 이후 한신대 박물관은 경당지구를 발굴하였는데, 제사유적과 제사 후 폐기된 도구와 음식을 버리는 구덩이 유구, 기와와 건물바닥에 까는 전, 토기, 유리구슬 조각, 제물로 보이는 12마리의 말머리 등이 나왔다. 경당지구의 제사유적 주건물은 길이 13.5m, 7, 길이 3m의 궁자형 가옥이었다. 

 

▲풍납토성

 

▲풍납토성

 

▲풍납토성

 

▲풍납토성

 

▲풍납토성

 

▲풍납토성

 

▲풍납토성

 

▲풍납토성

 

▲풍납토성

 

▲풍납토성

 

▲풍납토성

 

▲풍납토성

 

▲풍납토성

 

▲풍납토성

 

▲풍납토성

 

▲풍납토성

 

▲풍납토성 조감도

 

 

 

<2017. 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