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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후손마을 - 중국 난시 제갈팔괘촌 취록당

蔥叟 2017. 3. 26. 12:28

제갈량의 후손마을 - 중국 난시 제갈팔괘촌 취록당

 

聚祿塘

마을 입구에서 이르면 취록당이라는 연못을 만난다. 복이 모여드는 연못이라는 좋은 이름을 가졌다. 취록당 주변의 가옥들이 연못에 반영되어 보이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빨래는 하였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연못 언저리에 빨래판을 그대로 붙박이로 새겨둔 모습이 보인다. 제갈촌의 옛 이름은 '고륭'이다. 제갈 팔괘촌은 중국 제일의 팔괘로 배치된 마을이다. 마을 전체는 거대한 살아있는 문물이고 중국 옛 마을과 옛 민가가 완전하게 보존된 본보기이다. 이곳은 확실히 중국 제일의 기이한 마을로 3개의 기이함이 있다.

 

첫번째 기이함은 마을 전체의 절대 다수의 사람이 모두 1700여년 전 촉의 재상 제갈량의 후손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온 마을 사람은 거의가 성이 제갈씨이고, 혹은 제갈씨한테 시집온 부녀자이고 극소수만이 제갈 가족의 성원이 아니다.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 제갈량의 후손은 모두 16,000명인데 제갈팔괘촌 하나에 모여 사는 사람이 1/4이나 된다 한다.

 

두 번째 기이함은 마을의 배치의 정교함과 현묘함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을 전체가 팔괘형을 드러내여 집들, 거리의 분포와 방향이 흡사 역사적으로 기술된 제갈량의 구궁팔괘진과 일치한다. 제갈팔괘촌의 배치가 기묘하여 미로와 같다. 현지인이 말하는 일화에 따르면 이러한 마을배치가 가지고 있는 방위 기능을 알 수 있다. 1925년 북벌 전쟁 기간 난방의 국민 혁명군의 초경광부대와 군벌 손전영 부대가 제갈 촌 부근에서 3일간의 격전을 벌였는데 놀랍게도 마을에 총알이나 포탄이 떨어지지 않았고 마을전체가 손상됨 없이 안전하였다. 항일항전 시기에는 일본 군대가 마을 밖의 고융강의 큰 길을 지나면서도 의외로 이 마을을 발견치 못했다. 유일하게 단 한번 일본 비행기에서 투하한 탄환이 마을의 한 집을 폭파한 것뿐이다. 제갈팔괘촌의 가가호호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등을 기대며 종횡으로 난 길들이 통한 듯 막혔다. 외부인이 무턱대고 마을에 들어갔다가는 잘아는 사람을 따라서 길을 가지 않으면 왕왕 들어가서는 나올 수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도적이 무턱대고 들어왔다가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메다가 잡혔다고도 한다.

 

세번째 기이함은 이곳에 완전하게 보존된 대량의 원,명,청 3대의 고건축과 문물(가장 오랜것은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전)이다. 700여년 이래 왕조의 교체, 사회 동란, 전쟁의 난리 속에 얼마나 많은 중국의 명루고찰, 원림 대각이 전화로 불타고 혹은 전재로 훼손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곳의 큰 마을은 마치 세외도원처럼 전화에서 멀리 떨어져, 천재를 피하고 인화를 피했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제갈량의 원적은 낭양양도 (현 산동성 기남)이고, 그가 재상이었던 촉나라는 현재의 사천으로 절강 난계에서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의 후손들이 어떻게 이곳으로 와서 모여살면서 번성했을까.

 

취록당

 

취록당

 

취록당

 

취록당

 

취록당

 

취록당

 

취록당

 

취록당

 

취록당

 

취록당

 

취록당

 

취록당 빨래터

 

취록당 빨래터

 

취록당 빨래판

 

 

 

  <2017. 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