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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장락사터 칠층모전석탑

蔥叟 2016. 6. 13. 08:43

제천 장락사터 칠층모전석탑

 

통일 신라 때의 모전 석탑으로 칠층모전석탑은 한 차례 이상 중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6·25 전쟁 당시 포탄에 맞아 1층 탑신부와 옥개석의 남쪽과 동쪽 면, 2층의 동남쪽 옥개석 및 탑신부까지 피해를 입었으나 1967~1968년에 해체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칠층모전석탑 초창 시기와 관련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발굴 조사 결과 모전석탑의 조성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석탑의 북쪽과 서쪽 지역에서 확인된 3개 동의 건물지와 추정 담장지 유구를 통해 확보되었다. 건물지 유구 면에서는 삼국 시대의 승문평기와·선문평기와, 통일 신라 시대의 선문평기와·격자문평기와가 출토되어 통일 신라 시대에 건립된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

 

탑의 앞쪽에 위치한 제1건물지는 남북 자오선 상에 놓이는 통일 신라 시대의 평지가람 양식을 따르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석탑을 찾는 이들을 위한 법당으로 추정된다. 한편 담장지와 2개 동 건물지는 문지로 통일 신라 시대 사역과 석탑을 출입하기 위한 시설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석탑 주변의 담장지와 3개 동의 건물지가 형성하는 구조적 형태가 석탑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가장 어울리는 가람 배치 구조를 보이는 점 등으로 미루어 석탑의 조성 시기는 통일 신라 시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모전석탑은 장락사지의 2차 중창기에 중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미 1967~1967년 모전석탑을 해체, 복원하면서 기단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당시 백자종자편, 금동편, 금동 불상, 사리 장치 석재 등이 출토되어 석탑이 한 차례 이상 중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발굴 조사에서는 모전석탑의 중건과 관련한 자료가 제5건물지에서 확인되었다. 5건물지에서는 모전석탑에 쓰였던 완형의 석탑 부재가 건물의 부재로 전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편이라면 석탑 부재를 만들고 남은 것을 건물 조성에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지만, 애써 다듬은 완형의 부재를 건물 기단의 다른 석재와 함께 사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제22건물지 및 26건물 기단토에서 석탑 부재가 확인되었다. 장락사지의 2차 중창기는 고려 시대로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도 이 시기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모전석탑은 회흑색의 점판암을 벽돌 형태로 다듬어 쌓았다. 석탑은 높게 조성한 토단 위에 기단을 별도로 마련하지 않고 지대석으로 탑신부를 바로 받치도록 하였다. 지대석은 모두 8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남쪽 면에 커다란 판석 1매를 놓고 북쪽과 동·서단부에 7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였다.

 

1층 탑신부의 네 모퉁이에는 높이 137, 21의 화강암으로 된 방형 돌기둥을 세웠는데, 이러한 수법은 다른 전탑이나 모전탑에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수법이다. 남북 양면에는 화강암으로 두 개의 문기둥을 세우고 미석(楣石)을 얹어 방광(方框)을 만들고 문비(門扉)를 달았다. 방광의 외부 크기는 137×108이고 내부 감실의 크기는 남쪽이 85×60.5이며, 북쪽이 85.5×63이다. 문비는 2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중앙부에 지름 1.5, 깊이 6.52개의 홈을 내었다. 이 홈은 별도의 문고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1층 탑신의 높이는 네 모퉁이의 화강암 기둥과 같고 폭은 2.8m이며, 동서 양면은 전체를 모전석탑 부재로 축조하였다. 석재의 크기는 길이 17~52, 두께 4~7이다.

 

옥개석은 상하 모두 층단(層段)을 가진 전탑 특유의 형태를 보이며, 추녀도 짧게 마무리하였다. 추녀는 수평으로 평평하고 각 모퉁이 끝에는 풍령공(風鈴孔)이 뚫려 있는데 일부에는 풍령을 달았던 철제 고리가 남아 있다. 옥개 받침은 7~9단이며 층단도 이에 준한다. 옥개석은 15단 내외로 구성되었다.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으나 7층 옥개석 정상에 한 변 길이가 70의 낮은 노반이 남아 있다. 그 중심에는 지름 17의 두멍이 뚫려 있고, 이를 중심으로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이 구멍은 찰주공으로 해석되는데, 6층의 옥신부까지 이어진다.

 

1967년의 해체 복원 당시 5층 옥신부에서 길이 50~54, 높이 31의 부등변 사각형의 화강암 석재가 있었고, 그 중심에 네모꼴의 구멍이 있어 사리공으로 판단했으나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또한 7층 옥개 윗면에서 꽃 모양이 투각된 청동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석탑의 정상부에는 청동제의 상륜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 전면에는 회를 발랐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이는 상주의 회석심회피탑(灰石心灰皮塔)과 같은 수법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장락사지가 있는 지역은 예부터 영월~제천~단양~영주, 영월~제천~충주~문경, 영월~제천~충주~여주를 잇는 주요 교통로였다. 때문에 장락사지에는 삼국 시대부터 사찰이 건립되었고, 통일 신라,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들을 연결하는 거점 사원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의 도량인 흥녕선원은 장락사지에서 약 20남짓한 거리에 있고, 주천강과 고암천 등의 수로 교통과 주변의 육로가 발달해 교통이 편리하다. 충주와 단양을 거처 흥녕선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장락사지를 통과해야만 했으므로 두 사찰은 깊은 관련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흥녕선원에 징효대사가 주석했던 9세기에는 장락사지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더욱 높아졌고,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이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대의 사찰은 사원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군사·경제적인 역할도 수행하였으므로 중요한 거점 지역에는 사원이나 석탑을 건립하여 교통로를 관리·운영하였다. 고대 교통로 상에 남아 있는 석탑의 대다수를 전탑과 모전석탑이 차지하고 있으며 주로 낙동강과 남한강 수계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이처럼 전탑과 모전석탑이 다수를 차지하는 이유는 석탑의 고층화와 그에 따른 내구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전탑과 모전석탑은 수많은 석재들이 겹쳐져 결구되는 특성상 강한 내구성을 갖게 된다. 이외에도 풍수 사상에 입각한 건탑도 한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이 전탑이나 모전석탑의 대다수가 고층화를 이루고 있는 배경에는 국가 지배력의 중추신경망이라고 할 수 있는 교통로 경영에 큰 목적이 있으며, 더불어 풍수 사상에 의한 산천비보적인 신앙도 고려되었다고 할 수 있다.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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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칠층모전석탑

 

 

 

<2016.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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