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마도 조선국역관사순난지비
역관(譯官)은 에도(江戶)막부에 파견되었던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와는 성격이 좀 다른 외교사절이다. 지금 추모비에 모신 영령들은 일본 본토의 에도에 가기 위해 잠시 머물고자 했던 조선통신사 일행이 아니라 순전히 여기 대마도를 목표로 외교차 방문했던 관리였다. 그리고 역관은 단순히 통역관이 아니라 외교업무를 수행한 국가파견 사절이었고, 또 외국을 왕래하다 보니까 자연스리 무역에도 관여했다. 대마도 파견 역관사 일행은 100명 정도의 규모로 부중이었던 이즈하라(嚴原)까지 왕복하는 국가사절이었다. 조선후기에만 51회나 방문했다고 한다. 일본막부에서도 조선외교의 상당부분을 대마도 번주에게 일임했다고 한다.
1703년 2월 5일 조선역관사 108명을 태우고 부산을 출발한 배는 대마도 와니우라항의 턱밑까지 무사히 다가갔다. 이들은 대마도 3대번주의 죽음을 애도하고 새로 번주가 된 5대번주 종의방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국가사절이었다. 안내를 위해 예인선을 타고 일본관리 4명이 마중까지 나왔다. 그런데 바로 이때 갑자기 돌풍이 몰아치고 바다가 뒤집히듯 격랑이 일었다. 순식간에 112명 전원이 파도에 휩쓸렸으며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조선국 외교사의 가장 끔찍한 비극이었다.
역관사 일행은 정사 한천석과 부사 박세량을 비롯하여 상관 28명, 중관 54명, 하관 2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명단이 확인된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이라고 한다. 그동안 잊혀졌던 이름들을 대마도 종가문고(宗家文庫)에서 뒤늦게사 발견한 것이다. 대마도 번주가 종씨(宗氏)이니까 문중서적에서 확인된 것이다. 그리하여 한일 양국에서는 순국 400년을 맞이한 2003년 3월 7일, 이분들의 이름을 적은 추모비를 1991년에 세운 순난지비(殉難之碑) 앞에 추가 건립했다. 자연석을 성 쌓듯 짜맞춰 올린 3층 기단의 돌은 모두 112개라고 한다. 안타깝게 익사한 한분 한분을 상징한 것이다.
▲조선국역관사순난지비
▲조선국역관사순난지비
▲조선국역관사순난지비
▲조선국역관사순난지비
<2016.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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