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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백제를 찾아서 - 공주 공산성 연지ㆍ만하루

蔥叟 2015. 6. 4. 08:55

웅진백제를 찾아서 - 공주 공산성 연지만하루

 

연지는 공산성 안의 남쪽 영은사(靈隱寺) 앞에 자리하고 있다연지 안의 석축은 단을 두어 쌓았으며, 밑으로 내려갈수록 넓이가 좁아지는 형태를 하고 있다. 그리고 서쪽 호안(護岸)의 남쪽에 10여 단의 계단을 설치하여 연지 속으로 출입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는데, 이 통로는 위로부터 약 4m 되는 곳에서 다시 북편으로 90。 꺾여 연지의 밑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도록 하였다바닥에는 판석을 깔았는데, 동서편의 너비 약 9m에 남북편의 너비 약 4m로 되어 있으며, 입수구는 따로 없으나 북편의 금강을 향하여 약 40㎝ 가량의 배수로가 설치되었다.

 

또한 이 연지와 북편으로 흐르는 금강 사이의 대지에서 정면 3, 측면 2칸의 누각을 복원할 수 있는 조선시대의 팔각 석주들이 발굴되어 현재는 이를 복원하여 건립하였다이 연지는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이용하여 왔으며 공산성의 암문(暗門 :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세운 성문터)을 통하여 연지에 닿을 수 있는 완전한 자취도 조사되어 공산성의 자취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만하루는 1754(조선 영조 30) 충청감사 김시찬(時粲)이 공산성 동쪽 연못가에 6칸으로 건립하였다. 박윤원(朴胤源)이 지은 〈만하루기〉에 따르면, 만하루라는 명칭은 중국 시인 두보(杜甫)의 시 〈세병마(洗兵馬)〉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1859(철종 10)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와 1871(고종 8)에 편찬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도 만하루가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그때까지는 존재하였으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 이후에 홍수로 붕괴되어 매몰되었다.

 

1980년 공산성 내의 유적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만하루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1984년 지금의 누각으로 복원되었으며, 2006년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지금의 누각은 정면 3, 측면 2칸의 목조 건물이며, 옆에 연못도 복원되어 있다. 8각으로 다듬어진 초석(礎石)과 주위의 기단석(基壇石) 디딤돌 등은 원형대로 이용하고, 건물은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보통의 누정()들이 풍류를 즐기거나 강학(講學)을 목적으로 건립된 데 비하여 만학루는 공산성을 방비하는 군사적 기능을 중심으로 하고 경승 관람을 겸하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연지ㆍ만하루

 

▲연지ㆍ만하루

 

▲연지ㆍ만하루

 

▲연지ㆍ만하루

 

▲연지ㆍ만하루

 

▲연지ㆍ만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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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ㆍ만하루

 

▲연지ㆍ만하루

 

▲연지ㆍ만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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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

 

▲연지

 

▲연지

 

▲연지

 

▲연지

 

▲연지

 

▲연지

 

 

 

<2015.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