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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산길 - 경주 남산 미륵골 석조여래좌상

蔥叟 2014. 5. 22. 07:41

동남산길 - 경주 남산 미륵골 석조여래좌상

 

   미륵곡 보리사는 신라시대의 기록에도 등장하는 절이름이다.  헌강왕릉과 정강왕릉의 위치를 기술하면서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다. 하지만 현재의 보리사가 당시의 보리사인지는 두 왕릉의 진위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보리(菩提)'는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에서 따온 말로 보살행을 상징하고 있다. 5월은 곳곳에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는 시기이다. 보리사 석조여래좌상에도 철쭉이 만발하였다. 만발한 철쭉 꽃구름 위에서 높은 팔각연화대좌 위에 동쪽으로 결가부좌로 앉아 항마촉지인을 결한채 긴 눈을 가늘게 뜨고, 하계를 굽어 보고 있다. 약간 치켜 올라간 긴 두 눈썹사이엔 큰 광명을 비추는 백호의 흔적이 패어져 있고 삼각을 이룬 코, 그 밑에 조용히 다문 입술의 양가에 한 없는 자비가 어려있다. 우러러 보는 사람의 두 손을 저절로 모여지게 하기에 충분한 거룩한 불상이다. 나발로 표현된 육계는 높게 솟아 위엄스럽고 두 귀는 길게 어깨까지 드리워졌고, 목에는 삼도가 새겨져 부드럽게 불신과 연결되고 있다.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법의는 편단우견으로 입었는데 반대편 옷자락이 어깨 뒤로 넘어와서 오른쪽 어깨를 덮고 있다. 가슴에는 왼쪽 어깨에서 비스듬히 승기지가 엿보인다. 잘게 잡은 옷주름은 부드럽고 자연스러워 부처님 몸체를 감돌며 잔잔히 물결친다. 이렇게 거룩한 상이 머리에 비해 몸체가 조금 약하게 보이는 것은 못내 서운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잘고 섬세하게 표현된 가는 옷주름들은 그 약점을 더하여 주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석굴암 본존불의 양식을 이어받았으나 석굴암 본존상에 보이는 넓게 편 가슴과 당당하게 앉아 있는 자세에서 느껴지는 위엄이나 긴장감이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에서는 감소되었다. 또한 머리 크기에 비해 어깨와 무릎의 폭이 좁고 몸체의 볼륨감이 빈약하여 전체적으로 왜소하면서 불안정하게 보인다. 따라서 이 석조여래좌상은 8세기 말 내지 9세기 초의 작품으로 편년된다.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신광과 두광으로 된 거신광배는 화려하고 찬란하다. 여섯송이의 연꽃으로 장식된 두 줄기의 주연선을 불상 몸체의 뒤에 타원형으로 돌려 신광을 나타내었고, 다섯송이의 연꽃으로 장식된 두 줄기의 주연선을 머리위에 원형으로 돌려 두광을 나타내었다. 신광과 두광에는 구불구불 뻗어 오른 줄기와 잎사귀 사이의 간간이 핀 일곱송이의 연꽃위에 작은 화불이 새겨져 있다. 주연선 마디 마디에 연꽃을 장식한 것은 부처님의 빛이 비치는 그 곳에 연꽃처럼 깨끗한 정토가 되고, 화불은 부처님의 빛이 비치는 그 곳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뜻이다. 주연선 바깥으로 화염문이 새겨져 있는데 부처님의 빛과 위력을 나타낸 것이다. 미륵곡 석불좌상의 광배는 화려함과 정교함에 있어 우리나라 석불광배 중 손꼽히는 것인데, 아깝게도 깨진 윗부분 조각이 없어졌다. 후대에 다른 돌을 다듬어 보수하였으나 흉한 상처로 남아있다.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의 광배 뒷면에 약사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불상 높이가 1.27m되고 무릎넓이가 1m가량되는데, 얇은 돋을 새김으로 표현되었다. 두 겹으로 핀 앙련대좌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오른손을 가슴앞에 들고 왼손은 약그릇을 들어 무릎위에 얹고 설법하는 모습이다. 얼굴은 둥근편이데 마멸이 심하여 표정은 분간할 수 없다. 머리위에는 둥글게 두광이 그려져 잇고 몸체뒤에는 타원형으로 신광이 새겨져 있다. 그 둘레에는 불길이 타오르고 연화대좌 밑에는 피어 오르는 구름이 새겨져 있다. 구름위에 높게 앉으신 이 부처님은 동방유리광세계를 제도하시는 약사여래다. 왼손에 계인의 표시로 약그릇을 들었으므로 누구나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약사여래의 반대편에 계시는 석조여래좌상이 아미타여래라고 말한다. 하지만 광배의 불상이 동시대에 새겨진 것이라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조각기법이 선각이면서 평면화되어 있어 9세기의 조각으로 보여진다.

 

▲여래좌상 상호

 

▲여래좌상 상호

 

▲여래좌상 상호

 

   삼국시대의 불상은 조각 기법이 다소 세련되지 못했지만 전체의 모습이 건강하고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반면 통일신라 8세기의 불상은 조각 기법도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건강미가 넘쳐흐르며, 특히 8세기 전반기의 불상은 은은한 미소를 띠지만 중엽이후에는 미소가 있을 듯 없을 듯하면서 근엄한 모습이다. 9세기의 불상은 조각기법은 매너리즘에 빠지고 형식화되어 건강함을 잃었으며 미소도 사라져버렸다. 삼국시대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 통일 후에는 고구려와 백제 문화가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통일신라 문화의 뿌리는 바로 백제문화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보다 앞선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석조예술에도 그 힘을 지니고 있었는데 통일전쟁 이후 그 문화적 역량이 신라 문화에 흡입된 것이다. 통일기 이후에는 수도 경주의 문화가 지방으로 점차 전파되었다. 이처럼 신라인들은 남의 문화를 받아들여 자기화 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이것이 신라문화의 힘이요 포용력인 것이다.

 

▲광배의 선각약사여래좌상

 

▲광배의 선각약사여래좌상

 

 

 

<2014.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