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를 찾아서 - 부여 궁남지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궁남지란 이름은 왕궁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궁남지는 백제의 정원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연못 안에는 포룡정(胞龍亭)이라는 정자와 목조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궁남지
▲궁남지
▲궁남지
○三十五年, 三月, 穿池於宮南, 引水二十餘里, 四岸植以楊柳, 水中築島嶼, 擬<方丈仙山>.
3월, 대궐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이고, 사면 언덕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방장선산을 흉내낸 섬을 쌓았다.
○三十九年, 春三月, 王與嬪御泛舟大池.
39년 봄 3월,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
연못 주위에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 있고 토기와 기와 조각등이 출토되었다.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연못의 크기와 건물터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65년~1967년에 1만3천여 평 규모로 복원되었다. 현재 연못 안의 섬에 정자가 있고 목교가 놓여 있다. 그러나 수로와 물가·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연못의 규모 또한 정확히 알 수 없고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일종의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한다.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린다.
▲궁남지
▲궁남지
▲궁남지
○三十七年, 秋八月, 燕群臣於<望海樓>.
37년 가을 8월, 왕이 망해루에서 군신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三十九年, 春三月, 王與嬪御泛舟大池.
39년 봄 3월,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궁남지의 옛이름은 ‘마래방죽’으로 불렸는데 주변에 마밭이 많았기 때문이다. 무왕의 부왕인 법왕의 시녀가 연못가에 홀로 살다가 용과 통하여 아들을 얻었다. 그가 뒤에 후손이 없는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이다. 무왕은 서라벌로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며 “선화공주님은 밤마다 몰래나와 서동이와 잠을 잔다”는 동요를 퍼뜨려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궁남지
▲궁남지
▲궁남지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의 못가에 살았는데 그 못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게 되었다. 어릴 때의 이름은 서동이라 불렀는데, 재주가 뛰어나고 도량이 넓어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다 팔아 생계를 꾸렸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서동이라고 불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가 무척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은 서동은 머리를 깎고 서라벌로 가 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먹이며 친하게 지냈다. 아이들이 그를 따르게 되니 동요을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는 이러하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어러두고
서동방을
몰래 밤에 안고 간다.
▲궁남지
▲궁남지
▲궁남지
동요가 서울에 널리 퍼져 대궐에까지 들리게 되므로 백관들이 임금에게 간곡히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도록 했다. 공주가 떠나려 하자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주어 노자에 쓰도록 했다. 공주가 얼마 후 귀양터에 다다르게 될 즈음 서동이 나타나 공주에게 절하며 모시기를 청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지는 알지 못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믿음직하게 보였으므로 이를 허락했다. 서동은 공주를 따라가게 되었으며 동요가 불리워진 연유를 알게 되었다. 서동과 함께 백제로 와 모후가 준 금을 꺼내놓고 살아갈 계획을 세우려 하는데, 서동이 껄껄 웃으며 물었다.
"이게 무엇이요?"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이니 평생 부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처럼 많이 쌓아두었소." 이에 공주가 크게 놀라며 말했다.
"그것은 천하 제일의 보배이니 그대가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그것을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는게 어떻겠습니까?"
"좋소"
▲궁남지
▲궁남지
▲궁남지
이에 금을 산더니처럼 쌓아놓고는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 이것을 실어보낼 방법을 묻자 법사가 말했다.
"내가 신통한 도의 힘으로 보낼터니 이리 가져오시오." 이리하여 공주가 쓴 편지와 함께 금을 사자사 앞에 옮겨 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그 금을 하룻밤 동안에 신라 궁중으로 보냈다.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그를 더욱 존경했으며, 늘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이로부터 서동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 무왕조>
무왕의 탄생 설화는 익산의 ‘마룡지’에도 있다. 똑같은 이야기가 서로 멀지 않은 두 곳에서 전해지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포룡정
▲포룡정
▲포룡정 편액
▲서동요 편액
<2014.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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