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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임고서원 가설선죽교

蔥叟 2014. 3. 30. 00:20

영천 임고서원 가설선죽교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인 선죽교는 개성 남대문에서 종쪽으로 약 1km 거리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는 돌다리로 옛 이름은 선지교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919년 송도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8.35m, 너비 3.36m의 화강석으로 축조된 전형적인 널다리로 정몽주 선생이 후에 태종이 된 이방원 일파에게 피살된 장소이다. 여기 임고서원의 가설 선죽교는 서원을 성역화하면서 개성의 선죽교를 실측하여 그 규모대로 가설하고 한석봉이 쓴 선죽교 돌비석 또한 탁본하여 세워놓았다. 고려시대에는 돌난간이 없었으나 정조4년(1780) 정몽주의 후손 정호인이 개성 유수로 부임하여 선조의 유적에 우마차가 다님을 안타깝게 여겨 난간을 설치하여 통행을 제한하는 대신 행인을 위하여 바로 옆에 좁은 돌다리를 가설하였다.

 

▲선죽교

 

▲선죽교

 

   정몽주는 이성계(1335~1408)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에 끝까지 동조하지 않았다. 1392년(고려 공양왕 4년) 4월 4일 저녁 정몽주는 이성계를 만나 정황을 살피고 귀가하던 중,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그가 이성계 집을 방문한 것은 이방원이 계략을 써서 그를 초청했다고도 한다. 이때 이방원은 부하 조영규를 시켜 쇠뭉치를 꺼내어 선죽교 다리 밑에 숨었다가 정몽주가 지나갈 때 쳐서 죽여버려라 하고 지시하였고, 정몽주는 변중량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했었다.

 

   조영규와 무사들이 나타나자 그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하여 말을 타고 이성계의 자택을 떠났으나, 돌아오면서 친구 집에 들려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라했다. 말을 끄는 사람이 정몽주 선생이 술이 취해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한 눈치로 물으니,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직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 하고 답하였다. 그 말을 이해 못한 마부는 말을 끌고 선죽교(善竹橋)를 향했다. 선죽교를 넘으려 할 때 궁사가 말 혹은 정몽주를 저격하여 넘어트렸고, 마부가 쓰러지자 순간 4∼5명의 괴한이 나타나 부상당한 정몽주를 철퇴 또는 몽둥이으로 때려 죽였다. 

 

▲선죽교

 

▲선죽교

 

   정몽주가 죽은 후 그가 피를 흘렸던 자리에는 정몽주의 곧은 절개를 말해 주는 듯 한 그루의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선죽교의 원래 이름인 ‘선지교(善地橋)’에서 ‘선죽교(善竹橋)’ 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정몽주가 흘린 혈흔이 아직도 선죽교에 남아있다고 한다.

 

   선죽교는 김잠곡(金潛谷)의 〈송도구지〉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말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趙英珪) 등에 의해 이곳에서 철퇴를 맞아 숨진 사건 이후에 유명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선죽교의 석재(石材) 중에는 부근 묘각사(妙覺寺)에서 나온 다라니당(陀羅尼幢) 일부가 끼어 있다. 다리 동쪽에는 선죽교라는 3자가 한호(韓濩)의 글씨로 씌어진 비가 있고, 다리 서쪽에는 비각(碑閣) 안에 1740년(영조 16) 어제어필의 포충비(褒忠碑)와 1872년(고종 9) 어제어필의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또 부근에는 1641년(인조 19)에 부임한 유수 목서흠(睦敍欽)이 건립한 읍비(泣碑)가 비각 안에 있는데 여기에는 "一大忠義萬古綱常"이라 새겨져 있다. 이 읍비 앞에는 1797년 유수 조진관(趙鎭寬)이 찬한 녹사비(錄事碑)와 1824년(순조 24) 유수 이용수(李龍秀)가 찬하고 신위(申緯)가 쓴 녹사비도 있다.

 

▲선죽교

 

 

 

<2014.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