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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행주산성 토성

蔥叟 2014. 3. 19. 09:58

고양 행주산성 토성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텁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으로 쌓은 토축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험한 절벽을 이용하면서 펼쳐지는 넓은 평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전기의 산성 형식과 같다. 성은 동서로 약간 긴 1km 가량의 테뫼식 산성이다. 산꼭대기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내성과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2중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남족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자연적으로 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의 당이었으며, 서해안과 연결된 수로의 거점지역으로 남북 교통의 요충지대이다.

 

   성 안에는 삼국시대의 토기조각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많이 나오고, 물고기무늬를 새긴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서 고려시대까지도 사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로 선조 26년(1593)에 왜병과의 전투에서 성 안의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중므오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라 '행주치마'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이 산성은 한강 유역에 있는 다른 산성들과 함께 삼국시대 이후 중요한 방어요새의 역할을 한 곳으로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있으며 권율장군을 모시는 충장사가 있다.

 

   토성문지는 행주산성의 주출입구인 성문이 있던 곳으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지역이다. 행주산성의 토성 중 현재까지 복원된 구간 중 가장 낮은 곳에 해당하며 사뇨성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가장 완경사를 이루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다. 기록에 의하면 권율장군의조방장 조경이 목책을 쌓아 행주산성의 약점을 보완하였으며 전투경험이 풍부한 승군 등이 이 부근에 배치되어 치열한 전투 후 대승을 거둔 곳으로 여겨진다. 전략적인 위치상 아군과 적군 사이에 가장 많은 피해가 발생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기도 하다. 학술발굴조사 결과 문터의 서벽 아래에 문을 세우기 위한 두께 50cm 가량의 통일신라시대 성토층이 확인되었다. 문의 폭은 7m 가랴이며, 지면 아래서 확인된 생토암반을 파고 들어간 배수로는 산성의 자연배수로 역할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행주산성 성문터

 

▲행주산성 성문터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행주산성 토성

 

 

 

<2014.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