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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행주산성 권률장군상

蔥叟 2014. 3. 17. 05:42

고양 행주산성 권률장군상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행주대첩의 명장 권률장군의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철(轍)이고,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46세 때인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좌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鏡城判官)·의주목사 등을 두루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서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서울을 회복하기 위해 북진했다. 용인에서 일본군과 마주치자 권율은 우선 임진나루를 확보할 것을 건의했으나 묵살되었고, 결국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패전했다. 이후 광주에 되돌아갔다가 전라좌도도절제사로 임명되어 금산군 이치(梨峙)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크게 이기고 호남을 지켰다. 이 공으로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했다. 이해 12월 병마절도사 선거이(宣居怡)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다가 수원 독왕산성(禿旺山城)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왜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대군을 보내 성을 공격했으나, 수비를 굳게 하면서 유격전술로 맞서 이를 격퇴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서울에 고립되었다. 1593년(선조 26) 2월에 선거이에게 5,000의 병력을 나눠주어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쳐 도성의 왜적을 견제하게 하고, 자신은 관군 2,300명과 처영(處英)의 승병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했다. 이때 왜장 우키다가 지휘하는 3만의 적군이 7대로 나뉘어 맹렬히 공격했으나, 관민이 일체가 되어 싸워 적을 격퇴하고 크게 이겼다. 그뒤 파주산성으로 옮겨 주둔했다가,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휴전상태가 되자 전라도로 돌아갔다. 그해 6월 행주에서의 전공으로 도원수(都元帥)에 올랐으나, 도체찰사(都體察使) 및 순찰어사(巡察御使)와의 불화로 말미암아 도망병을 즉결처단한 일이 빌미가 되어 1596년 해직되었다. 그러나 바로 한성부판윤으로 기용되어 비변사당상을 겸직하고, 충청도순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권율장군상

 

▲권율장군상

 

▲권율장군상

 

 

 

<2014.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