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후금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후인 인조 2년(1624)에 공사를 다시 시작하여 인조 4년(1626)에 완공하였다. 인조 때부터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10여 차례의 증, 개축이 이루어지는 등 각종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가장 잘 완비되어 있다. 지금은 동, 서, 남 문루와 장대, 돈대, 암문, 우물, 보, 누 등의 방어 시설과 군사훈련시설 등이 남아 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된 곳으로 손꼽힌다.
조선 인조 때, 한 척의 배가 서울 삼개나루에 닿았다. 배에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불경을 담는 궤짝만 실려 있었는데, 궤짝 위에는 ‘중원개원사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를 발견한 삼개사람들은 이상한 일이라고 여겨 왕에게 올렸다. 삼개에서 보내온 궤짝을 보고 그 사연을 들은 인조는 이렇게 말했다. “궤짝 위의 글을 보니, 그것을 우리나라의 개원사에 보내 길이 보관하라는 뜻인 것 같다. 서둘러 개원사라는 절을 찾아보도록 하라” 신하들이 개원사라는 이름의 절을 찾아보니, 남한산성 안에 있었다. 인조는 그 불경 궤짝을 귀중하게 그리로 보냈다. 어느 날 개원사에 불이 나서 절 전체가 타버릴 위험에 처하자 갑자기 불길의 반대편에 거센 바람이 불어와 일순간에 불이 꺼져버렸다. 그 후에도 불이 나곤 했지만 불경궤짝이 있는 곳은 무사했다. 이렇게 여러 차례나 신기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개원사를 부처님이 보살피는 절이라고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남한산성
▲남한산성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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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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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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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남한산성
▲남한산성
▲남한산성
▲남한산성
▲남한산성
▲남한산성
▲남한산성
<2013.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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