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홍주성
최초 축성연도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백월산 중턱에 위치했던 해풍현이 현재 위치로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측되며 규모는 1,300척의 토성으로 400개의 성첩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후 여러 차레 보수 확장을 하였고 조선시대 고종 7년(1870) 홍주목사 한응필이 연봉금 3천냥과 원납금, 지세부과금으로 석성을 개축하여 1,830척에 500척을 증보하여 석축하면서 650개의 첩과 130개의 치, 2개의 곡성(曲城), 4곳의 우물과 연못을 신설한 다음 동서에 수문을 두어 서문천의 물을 끌어 동천 수문을 거쳐 남문천과 금마천으로 흐르게 하고 동서쪽에 문을 세우고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虹霓門)으로 하였다.
같은 해 대원군이 휘호한 문액(文額)을 받았는데 동문은 조양문(朝陽門), 서문은 경의문(景義門), 북문은 망화문(望華門)이라 하였다. 그 후 홍성지방 일본인들이 서문과 북문을 훼철하고 성곽 곳곳을 철거하면서 동문마저 훼철하려던 것을 유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하였다. 홍주성은 최장 1,772m에 달하였으나 810m만 현존하며 성내에는 관아건물이 35동에 이르렀으나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동헌), 여하정만이 남아있다. 1978년 10월 7일 강도 5도의 지진이 발생하여 성곽의 일부가 붕괴된 것을 계기로 성곽 주변 가옥 64동 철거와 토지를 매입하여 주변정비와 성곽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홍주성은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가지 읍터로서 크게 변동이 없었으며 조선 초기의 성쌓기 방법을 따르고 있는 것이 구조적 특징이다. 홍주성은 구한말 의병장인 민종식(閔宗植)과 이세영(李世永), 안병찬(安炳瓚) 등이 을사조약의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켜, 이해 3월 20일 이 성에 있던 일본군을 죽이고 3일간 항쟁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하였던 일로 유명하다.
▲홍주성
▲홍주성
▲홍주성
▲홍주성
▲홍주성
▲홍주성
▲홍주성
▲홍주성
▲홍주성
▲홍주성
▲홍주성
▲홍주성
▲홍주성
▲홍주성
▲홍주성
▲홍주성
<2012. 8. 19>
'◈한국문화순례◈ > 내포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성 홍주성 원옥 (0) | 2012.09.30 |
---|---|
홍성 홍주성 수성비 (0) | 2012.09.30 |
홍성 용봉산 신경리 마애불 (0) | 2012.09.29 |
홍성 용봉산 용봉사 석조승탑 (0) | 2012.09.29 |
홍성 용봉산 용봉사 석조ㆍ마애ㆍ석구 (0) | 2012.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