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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사카성(大阪城)

蔥叟 2012. 5. 25. 01:00

일본 오사카성(大阪城)

 

   임진왜란을 일으켜 한반도를 유린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찢어지게 가난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무렵에는 일본에도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어서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난 자는 여간해서 입신출세가 어려웠다. 그 점, 도요토미는 윗사람을 잘 만난 행운아 중의 행운아였다. 도요토미보다 나이가 두 살 많았던 그의 상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이름난 용장(勇將)이었다. 성격이 잔인하고 불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의 상식을 뒤엎는 파격적인 면모를 지닌 리버럴리스트였다. 그는 출신성분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당사자만 똑똑하면 과감하게 발탁하여 중용했다. 아마 오다가 없었더라면 도요토미라는 이름도 결코 역사에 남지 않았으리라.

 

▲오사카성

 

▲오사카성 전경

 

▲오사카성 외굴(外掘)

 

▲오사카성 외굴(外掘)

 

   주군(主君)인 오다가 1582년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고 암살당한 뒤 권력은 거의 도요토미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그로부터 도요토미의 빗나간 행각이 벌어진다. 워낙 어렵게 자라난 과거의 기억이 억울했던 탓인지 최고 권력자가 되자 극도의 사치를 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절과 신사를 위시하여 가는 곳마다 화려한 건축물이 세워졌다. 외양만 화려한 것이 아니라 건축물 내부도 멋진 그림과 조각으로 채웠다. 그로 인해 일본미술사에서는 이 시기를 ‘아쓰지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오사카성 외굴(外掘)

 

▲오사카성 외굴(外掘)

 

▲오사카성 외굴(外掘)

 

▲오사카성 외굴(外掘)

 

▲오사카성 외굴(外掘)

 

   도요토미가 자신의 거처로 지은 오사카 성(城)도 마찬가지였다.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로 불린 절터에 1583년부터 축성하기 시작, 본채는 1년 6개월 만에 완공했다. 나머지는 그가 죽기까지 15년에 걸쳐 서서히 지어졌다. 일본에서 성 안에 천수각(天守閣)을 세운 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본거지였던 아쓰지 성(安土城)이 처음이었다. 도요토미는 오사카 성에 두 번째 천수각을 지으며 아쓰지 성의 그것을 능가하고 싶었다. 그래서 5층 누각 전체를 금과 은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일종의 콤플렉스에 기인한 보상심리로 여겨지는데, 심지어는 화장실조차 온통 순금으로 장식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사카성 외굴(外掘)

 

▲오사카성 외굴(外掘)

 

▲오사카성 외굴(外掘)

 

▲오사카성 내굴(內掘)

 

▲오사카성 내굴(內掘)

 

   그러나 졸부가 죽으면 일장춘몽도 사라지는 법이던가! 조선 침략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도요토미가 죽은 뒤 1614년 겨울과 이듬해 여름에 벌어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막판 대공세로 오사카 성은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 후 도쿠가와 막부의 직할령으로 바뀌었던 오사카 성은 3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1604~1651년) 시절 각 지역 영주들에게 공사를 할당하여 복원했다. 이때 외부에서 보기에는 5층(내부는 6층)인 높이 58.5m의 천수각도 다시 세워졌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쌓은 성 외곽의 석축은 영주들의 충성심 경쟁으로 각 지역에서 잘 빠진 돌만 골라 옮겨온 것이었다.

 

▲오사카성 내굴(內掘)

 

▲오사카성 내굴(內掘)

 

▲오사카성 내굴(內掘)

 

▲오사카성 내굴(內掘)

 

▲오사카성 내굴(內掘)

 

   이웃나라를 괴롭힌 첫 주인 탓이었던지 아이로니컬하게 오사카 성은 세 번이나 벼락을 맞았다. 1665년에 두 번째로 떨어진 벼락은 복원했던 천수각을 태워 버렸다. 이후 1928년에 와서 일반시민들로부터 150만 엔을 모금하여 세 번째 복원 공사를 시작할 때까지 오사카 성에는 천수각이 없었다. 1931년이 되자 철근 콘크리트로 완공한 천수각을 중심으로 전체 면적 약 106ha의 오사카 성 공원이 조성되었다. 공원 내에는 박물관과 음악당 등 여러 시설이 들어섰다. 현재 오사카 성 천수각은 8층의 전망대를 빼고는 마치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사박물관처럼 꾸며져 있다. 하지만 1945년의 미군 공습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거듭된 파괴와 복원공사 탓으로 성채의 원형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사카성 내굴(內掘)

 

▲오사카성 내굴(內掘)

 

 

 

<2012. 4.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