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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열도의 백제문화 - 일본 나라 도다이지 중문(中門)

蔥叟 2012. 5. 20. 01:01

일본열도의 백제문화 - 일본 나라 도다이지 중문(中門)

 

   왜가 도다이지(東大寺)를 창건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한민족과 완전히 결별하고, 동아시아 신질서에 진입했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한 것이었다. 663년 백제의 광복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백제 유민들은 일본 열도로 밀려들었다. 이들은 곳곳에 방어체제를 구축하면서도 열도의 기존 세력들과 힘을 합쳐 일본국가 건설에 매진했다. 그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고구려 유민들도 밀려들었다. 670년 일본(日本)이란 새 국호가 선언되고 국가가 탄생했다. 그러나 국가체체의 정비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문

 

▲중문과 대불전

 

   8세기 들어 일본 열도는 율령체제가 성립되고 천황제가 확립됐다. 하지만 지배계급 내부에서 중앙의 후지와라 씨(藤原氏)와 다른 우지(氏)들 간의 투쟁이 격화되어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동북지방은 아직 개척이 진행 중이었으며 그 외에도 각 세력이 지방에 흩어져서 독자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해야 했다. 더구나 백제, 고구려 유민들의 집단 이주로 중앙지배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도쿄 지방은 한반도계 진출자들에 의해 개척이 되었다. 『속일본기』 영구(靈龜) 2년 (716년)조에 의하면 스루가(駿河), 가이(甲裴), 사가미(相模), 가즈사(狀總), 시모우사(下總), 히다치 (常陸), 시모쓰케(下野)의 고려인 1799명을 무사시국(武藏國)에 옮기게 하고 고마군을 설치하였으며 약광왕(若光王)을 그 군의 대령(大領)으로 삼았다고 한다.

 

▲중문

 

▲중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작이 거듭되고 질병이 창궐했다. 위기에 처한 신흥국가인 일본 조정은 국가적으로 민심을 수습해야 했고, 왕실의 존엄성도 높여야 했다. 특히 적대관계인 신라에는 국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의 신흥세력들은 일련의 새로운 정책들을 추진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지금껏 고대 한일관계사 해석에 문제를 일으키는 『고사기』(712년), 『일본서기』(720년) 같은 역사책을 편찬하는 일이었다. 당시 편찬 작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 오오노야스마로(太安萬侶)를 비롯한 백제 유민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이데올로기의 통일, 지방세력의 약화 등을 목적으로 도다이지(東大寺) 같은 군분사(國分寺)를 전국에 창건하는 일이다.

 

▲중문

 

▲신장상

 

   쇼무(聖武)천황은 741년 ‘국가진호’란 이름 아래 지배체제의 강화와 사상의 통일을 위해 전국의 국마다 국분사(金光明四天王護國寺)와 국분니사(法華滅罪寺)를 건축하였고, 도다이지는 천황가의 우지테라(氏寺)로서 국분사의 총본산이었다. 천황은 민중의 신망이 높은 교키(行基) 스님에게 큰 절을 지어 불심으로 국가를 안정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스님은 일흔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전국을 돌며 보시를 받아 도다이지를 세우고, 세계 최대의 법당과 불상을 조성해 천황의 권위를 세웠다. 또 700여 신을 모시던 일본인들에게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보여주었다.

 

▲신장상

  

 

 

<2012. 4.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