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열도의 백제문화 - 일본 아스카 이시부타이(石舞臺)
아스카(飛鳥)는 낮은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들판 곳곳에 야트막한 구릉들이 산재해 있는데, 그 사이로 고분들이 흩어져 있고, 구릉으로 보이는데 정작 고분인 경우도 많다. 이미 발굴돼 유물조사가 끝난 곳도 있고, 아직 발굴이 안 됐거나 고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곳들도 많다. 이런 아스카의 고분들 가운데 가장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고, 피장자의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고분이 바로 이시부타이(石舞臺) 고분이다. 이시부타이 고분은 아스카천 상류, 구릉이 자락처럼 흘러내려오는 중간에 거대한 돌덩어리들로 형성되어 있다. 무덤의 봉분은 다 벗겨져 버리고, 내부의 현실(玄室) 또한 비바람에 노출된 채 장중히 자리잡고 있는 거대 고분이다.
▲이시부타이(石舞臺)
▲이시부타이(石舞臺)
그 독특한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시부타이는 고분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60여 년 전 나라현(奈良縣)과 교토 대학에서 학술 조사를 실시한 결과, 비로소 주구(周溝)를 둘러 쌓은 상원하방분(上圓下方墳)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75t이 넘는 거대한 화강암 30여 개로 석실이 구성되어 있는데, 현실은 횡혈식으로 길이가 7.7m, 폭은 3.6m, 높이는 4.7m가 넘는다. 이 고분에서는 부장품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피장자의 신분은 물론, 축조 연대조차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시 왕릉을 능가하는 대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버림받은 채 천 수백 년을 내려왔다는 사실이 아스카 시대의 정치상황을 짐작케 할 뿐이다.
▲이시부타이(石舞臺)
▲이시부타이(石舞臺)
이시부타이 고분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일본고대사의 독특한 사회구조를 알 필요가 있다. 일본사회는 고대로 이행하면서 원시사회의 혈연공동체적 사회의식이 붕괴되고 활동 공간도 크게 확대된다. 일정 지역에서 같은 조상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제사를 중심으로 동족단을 구성했다. 이 동족단(同族團)을 우지(氏)라 부른다. 우지들은 모두 가바네(姓)를 가지고 있으며 신분을 나타내는 칭호도 갖고 있다. 우지의 명칭은 거주지명을 따라 이시카와우지(石川氏), 가쓰라기우지(葛城氏)라든가, 혹은 조상의 이름을 따라 구메우지(久米氏), 세습하는 직업명을 따라 나카도미우지(中臣氏), 인베우지(忌部氏), 모노노베우지(物部氏) 등으로 불렸다.
▲이시부타이(石舞臺)
▲이시부타이(石舞臺)
야마토 조정은 이처럼 크고 작은 우지가 모여 형성된 것이며, 그 중 대표적인 우지가 이른바 천손족(天孫族)이다. 이 우지의 가장인 우지가미(氏上)는 모든 우지의 가장으로서 정치적 수장의 자격을 갖는다. 이를 오키미(大王)라고 하는데 이것이 발전해 천황이 된 것이다. 7세기경 이런 우지들 가운데서 천황을 누를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우지가 바로 소가우지이다. 소가우지의 가계는 소아석천숙(蘇我石川宿)에서 시작해 만지(滿智), 한자(韓子), 고려(高麗) 그리고 중흥조인 도목(稻目)을 거쳐 마자(馬子), 하이(蝦夷), 입록(入鹿)으로 연결되면서 끝난다. 그런데 만지란 인물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조에 등장하는 목협만치(木?滿致)로 추정된다. 목협만치는 개로왕 21년 (475) 9월,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왕도가 위협당하자 왕자인 문주와 함께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던 인물이다. 이후 그의 흔적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이시부타이(石舞臺)
▲석실 내부
▲석실에서 내다본 모습
야마토(大和)에 근거를 둔 신흥세력인 소가우지는 불교의 수입을 매개로 백제와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고대국가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불교는 질서 개편을 요구하던 정치권에 변화의 강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불교 교리는 물론, 불교가 가진 정치·문화적인 배경이 상승적으로 작용해 야마토 조정에는 종교투쟁 형식의 정치권력 투쟁이 전개됐다. 정치투쟁은 내부적으로는 대왕가와 호족들의 싸움, 불교의 도래와 함께 새롭게 등장한 신흥 호족과 구(舊)귀족의 갈등 등 복합적인 양상으로 전개됐다. 대외적으로는 불교를 전수해 준 백제세력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대왕 및 신흥 호족을 한편으로 하고, 상대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구호족들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양대 세력 간의 갈등으로 전개됐다.
▲이시부타이(石舞臺)
이때 불교의 수용을 놓고 친(親)황실계이며 신흥세력으로서 오오미(代臣)인 소가우지(蘇我氏)는 강력한 무장집안으로서 오무라지(大連)인 모노노베 우지(物部氏)와 신도(神道)의 제식을 맡은 집안인 나카토미우지(中臣氏)의 보수연합과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백제의 후원과 시대적 요구에 힘입어 소가우지는 30년 만인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시대에 이르러서 강력한 정적인 모노노베우지를 타도하고 587년에 불교를 공인받는다. 이처럼 복잡한 정치적 갈등을 거쳐 공인된 불교의 수용은 소가우지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했고, 한편으로는 친(親)백제계를 기반으로 한 황실세력의 강화를 의미했다. 그러나 강력한 권력을 획득한 소가우지는 곧 왕권을 확립하려는 왕실과 갈등을 일으켰고, 그 갈등은 복잡한 정치 역학 속에서 소가우지의 몰락을 가져왔다.
<2012.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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