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단속사터 삼층석탑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지리산 동쪽에 있었던 사찰로 748년(35대 경덕왕 7)에 대나마 李純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763년(35대 경덕왕 22)에 信忠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삼국유사]의 '신충 괘관'조에 실려 있다. 경덕왕 때에 직장 이순이 발원하기를 나이 50이 되면 출가하여 절을 짓겠다고 하였다. 748년에 마침 그의 나이가 50이 되었으므로 원래 있었던 작은 절을 중창하여 단속사라 하고, 스스로 삭발하여 법명을 空宏長老라 하였다고 전한다. 또 763년에 신충이 관직을 사퇴하고 두 친구와 함께 지리산에 들어갔는데, 경덕왕이 두 번이나 불러도 나오지 않고 머리를 깎고 사문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대왕의 복을 빌겠다고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
▲서삼층석탑
효성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어진 선비 신충과 더불어 대궐 뜰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며 하루는 말했다.
"뒷날에 만약 내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자 신충은 일어나서 절을 했다. 그 후 몇 달 뒤 효성왕이 즉위하여 공신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깜빡 잊고 명단에 넣지 않았다. 이에 신충이 원망스런 노래를 지어 이를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갑자기 말랐다. 왕이 이상히 여겨 여러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게 했더니 노래를 가져다 바쳤다. 왕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정무가 복잡하고 바빠 하마터면 각궁(角弓)을 잊을 뻔 했구나." 하며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자 잣나무는 그 때야 살아났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뜰의 잣나무는 가을에도 아니 이울어져 너를 어찌 잊을꼬. 하시던 우러러 보던 얼굴은 계시건만, 옛 못의 달그림자 가는 물살 원망하듯, 너의 모습 바라보나, 누리는 싫어라.
이렇듯 전귀는 있으나 후귀는 없어졌다. 이로써 신충은 효성왕, 경덕왕 두 왕조에 벼슬하여 그 신임이 무척 두터웠다.
경덕왕 22년 계묘(763)에 신충은 두 친구와 서로 약속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악에 들어갔다. 왕이 두 번을 불렀으나 그 곳에서 나오지 않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는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세우고 그 곳에서 살았다. 평생을 구학(丘壑)에서 마치며 대왕의 복을 빌기를 원했으므로 왕은 이를 허락했다. 임금의 진영을 모셔 두었는데 금당 뒷벽에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남쪽으로 속휴라는 마을이 있는데 현재는 와전되어 소화리라 한다.
또 별기에는 이렇게 전한다. 경덕왕 때에 직장 이준이 일찍이 소원을 빌었더니 나이 50이 되면 조연소사를 고쳐 지어 큰 절로 만들고 이름을 단속사라 했다. 자신도 또한 머리를 깎고 법명을 공굉장로라 하고 절에 거주한 지 2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는 앞의 삼국사에 실린 것과 같지 않으나, 두 가지 설을 실음으로 의심하는 점을 덜고자 한다.
<삼국유사 <신충괘관(信忠掛冠)조>
▲서삼층석탑 탑신부
조선 초기에는 교종에 속하였으며 정확한 폐사 연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른바 '점필재 삼총사'로 불리우는 김일손, 정여창, 김굉필이 함께 지리산 천왕봉을 등반한 후 김일손이 쓴 [두류 기행]을 보면 그들은 단속사로 들어가면서 "절이 황폐하여 지금 중이 거처하지 않는 곳이 수백 칸이 되고 동쪽 행랑에 석불 500구나 있는데 하나하나가 각기 형상이 달라서 기이하기만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초기까지는 숭유배불 정책에 의해 간신히 지탱하다가,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 소멸된 것이라 추측된다.
또한 이 곳 단속사터는 한국사상사적인 면이나 금석문적인 면에서 기념비적인 유허라 할 수 있다. 신행선사가 통일신라시대에 법랑에 이어 북종선을 전래한 신사상의 소유자이고, 대감국사는 신품사현의 한 사람인 고려 시대 최고의 명필었다. 신행선사와 대감국사의 부도비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조선 중기 가지 전하였으나 현재는 일부 비편만이 동국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다행히 탁본집이 전하고 있다.
신행선사(?∼779(36대 혜공왕 15))는 경주 출신으로 장성한 나이에 출가하여 신라에 최초로 북종선을 도입한 법랑선사(생몰년 미상, 27대 선덕 여왕때 당에서 북종선을 최초로 도입함)에게서 선법을 구하였다. 스승 법랑 선사가 입적하자 구법을 위해 당나라로 들어 갔으나 흉년이 들어 도둑이 횡행하여, 그도 혐의를 받고 옥에 갇혔다가 40일만에 석방된 뒤, 지공에게서 3년간 공부하여 수기를 받았다. 그 뒤 귀국하여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다가 지리산 단속사에서 입적하였다. 그는 법랑이 못다 편 북종선을 좀더 확대 발전시킨 인물로 한국사상사에 한 전기를 마련한 인물이다.
비는 813년(헌덕왕 5)에 건립되었는데 비석은 파손된지 오래다. 다행히 비의 탁본이 전해오며 유희해의 [해동금석원]에 전문이 실려 있다. 이에 의하면 비문은 김헌정이 지었고, 글씨는 승려 영업이 썼다. 서체는 행서로 자체는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집자성교서]와 아주 비슷하다. 영업은 당나라에 유학한 관계로 당시 당에서 크게 유행한 왕희지체를 거의 그대로 썼다고 보며, 더욱이 당시 신라에서도 왕희지의 글씨가 다수 전해져 유행하였다. [집자성교서]에 보이는 약간의 불균형을 정리, 글자의 균형을 이룬 엄정한 품격은 영업의 글씨가 지니는 독자적인 경지라 하겠다. 다소 경직된 느낌은 있으나 힘차면서도 여유있는 점은 김생과 함께 신라 서예의 쌍벽을 이룬다 하겠다.
▲동삼층석탑
대감국사 탄연(1070, 문종 24 - 1159, 의종 13)은 밀양 출신으로 15세에 명경과에 합격하여 숙종의 초청으로 세자를 가르치다가 궁중에서 몰래 빠져나와 혜소국사 정현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선지를 전해 받고 다시 총림을 두루 방문하여 증득한 바를 단련하였는데 모든 학자들이 그를 경모하였다. 뒤에 늙은 어머니 때문에 멀리 떠나지 못하고 고향 근처에 조그마한 절을 구하여 봉양하였다. 45세에 교종의 최고 지위인 삼중대사가 되었고, 62세에 선종의 최고 지위인 대선사가 된 뒤부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에 응하였다. 한편 서예에도 뛰어나 왕희지체를 따랐는데 강원도 춘천의 청평사 문수암의 중수비를 썼다. 조선 초기 학자인 서거정은 김생, 유신, 최우와 더불어 그를 신품 4현이라 부를 만큼 글씨가 뛰어났다.
비는 1172년(명종 2년)에 만들어진 것이나 망실되어 지금은 파편 일부만 남아있다. 문경 김용사에 탁본이 보관되어 있으며, 이지무가 비문을 짓고 글씨는 승려 기준이 썼다. 비문의 글씨는 그의 스승인 탄연의 글씨를 본받아 왕희지의 필법을 잘 체득하여 쓴 것으로 고려시대의 매우 발전된 행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명종 13년 1558년 음력 5월 58세의 나이로 벗들과 함께 열한 번째 지리산 유람에 나선 남명 조식은 단속사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솔 아래 천년 옛절이 창연한데 사람이 한 마리 학을 따라 찾아드니
중은 굶어서 부엌이 싸늘하고 금당은 낡아 구름에 파묻혔네
등불은 봉우리의 달을 밝혀주고 방아는 물밑의 망칫돌이 대신했네
부처 앞 향로에는 불도 꺼져 오직 재처럼 식은 마음을 보네.
松下千年寺 人隨獨鶴尋 / 僧飢조朝冷 殿古野雲深 / 燈點峰頭月 春聲水底砧 / 佛殿香火死 惟見己灰心
단속사의 금당지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 2기. 산청 단속사지 동 3층석탑은 보물 제72호, 산청 단속사지 서 3층석탑은 보물 제73호. 높이 각각 530㎝. 두 탑 모두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3층석탑이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이 붙은 4매의 석재로 이루어졌으며 각 면마다 우주(隅柱)와 2개의 탱주(撑柱)를 모각했다. 갑석(甲石)의 윗면은 약간의 물매를 잡고 중앙에 2단 굄을 각출해 상층기단을 받치도록 했다. 상층기단의 각 면에는 2우주와 1개의 탱주를 모각하고, 그위에는 밑에 부연(附緣)이 있는 갑석을 놓았다. 탑신부의 옥신(屋身)과 옥개(屋蓋)는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옥신에는 우주만 새겨져 있고,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고 합각(合角) 부분에 약간의 반전이 있다. 동탑의 상륜부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까지, 서탑은 노반·복발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두 탑은 균형이 알맞아 안정감을 주며 상층기단의 탱주가 하나로 줄어든 점과 옥개석의 반전 등으로 보아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탑 탑구
<2012.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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