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을 찾아서 - 산청 남명묘소
1572년에 남명이 죽자 선조는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그의 나이 만 72세였다. 사후 선조 때 증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에 증직되었다가, 광해군 때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산천재 맞은편 산자락에 남명의 묘가 있다. 신천재 뒷산 임좌원에 자리잡고 있는 선생의 묘소는 남명선생이 생전에 직접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소에는 대곡 성운선생이 지은 묘갈명이 서 있다. 묘소는 돌담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고풍스러운 느낌이 든다.
▲남명 묘소 전경
▲남명 묘소 전경
남명묘소는 지리산과 덕천강 그리고 덕산의 마을이 한 눈에 다 조망되는 위치에 있다. 남명묘소는 옥녀가 비단을 짜고 있는 옥녀혈을 안산으로 했다. 즉 안산은 옥녀가 비단을 자고 있는 형국인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이며 묘소혈은 회룡고조형에 잠두혈이다. 옥녀가 비단을 짤 수 있는 것은 누에가 실을 뽑아주기 때문이다. 잠두혈과 옥녀 그리고 비단. 완벽한 형국이다. 남명학이 오늘날 각광을 받고 빛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남명 묘소
▲남명 묘소
남명묘소 아래에 또 한기의 묘가 있으니 묘비에 ‘봉숙부인송씨지묘(封淑夫人宋氏之墓)’라는 글씨가 뚜렷하다. 내명부 3품 벼슬인 숙부인으로 봉해진 은진 송씨의 묘지라는 뜻이다. 숙부인 송씨는 바로 남명의 부실(副室) 송린(宋璘)의 따님이다. 송씨는 남명이 50세때 19세의 나이로 부실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남명은 22세때 충순위 조수(曺琇)의 따님에게 장가 들었다. 처가는 남평 조씨로 대대로 김해에서 살아온 부유한 집안이었다.
▲남명 묘소와 안산
▲남명 묘비
남명은 서울서 내려와 자굴산에 머물다, 어머니 인천 이씨를 모시기 위해 처가가 있는 김해 신어산 아래 탄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때 남명의 나이 30세였다. 이로부터 15년이 흐른 후, 남명이 45세때 어머니 인천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산에 모시고 3년상을 치르며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 3년상을 마치자 넉넉한 살림의 처가살이를 마다한 채 부모의 묘소가 있는 고향 삼가로 돌아왔다. 이때 부인에게 같이 삼가로 갈 것을 권했지만, 부인 조씨는 김해에 그대로 살기를 원하면서 삼가로 가질 않았다.
삼가로 와서 혼자 사는 남명에게 밥 해주고, 빨래도 해 주는 등 시중을 들 사람이 필요 했다. 그래서 남명은 같은 삼가 관내 대병에 사는 선비 송린(1509-1573)의 딸을 부실로 맞이한 것이다.
▲남명 묘비
▲남명 묘비
송씨는 남명과 혼인한 이듬해 아들 차석(次石)을 얻었다. 이후로도 송씨는 아들 차마(次磨), 차정(次정)과 딸 하나를 두었다. 송씨 묘소 앞의 비석 글은 둘째 아들인 차마가 지은 것이다. 그 글 첫머리에 “아 우리 어머니 송씨를 숙부인으로 봉한 것은 큰 아들 차석이 부모의 음덕으로 대부의 벼슬을 얻어 이런 특이한 은전이 있었다”라고 하여 부실인 송씨가 숙부인이 된 것은 장자 차석이 대부 벼슬을 지내, 그 덕에 어머니인 송씨도 숙부인으로 봉해졌다고 했다.
▲남명 묘비
▲숙부인 송씨 묘소
또 이 비석에는 송씨부인이 1532년 태어나 18세때에 남명에게 시집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송씨 부인은 남명에게 시집을 와서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을 대할 때 한결같이 온화함과 엄중함으로 하였다고 한다. 남명이 삼가에 있을 때 곁에서 10여년간 시중을 들다가 61세때 덕산으로 옮겨오자 역시 같이 와 남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성으로 곁에서 모셨다. 남명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홀로 살면서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 모두 벼슬에 나가도록 하고 세상을 떠나니 향년 79세(1610년)였다.
▲숙부인 송씨 묘소
<2012.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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