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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전구형왕릉

蔥叟 2012. 1. 25. 02:01

산청 전구형왕릉

 

   구형왕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다. 가야는 낙동강 유역과 지리산을 경계로 그 사이에 위치하였고, 금관가야와 그에 예속된 다섯 가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한때 일본에 가야의 분국인 야마타이왕국을 둘 정도로 상당한 세력을 떨쳤다. 그러다 신라 법흥왕 때 신라에 합병되면서 492년간 지속되었던 가야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때 패망국 가야와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의 행적도 망각의 역사 속으로 함께 묻혀 버렸다.

 

▲전구형왕릉

 

▲전구형왕릉

 

   구형왕의 능이라고 전하는 유적이 산청에 전해온다. 구형왕릉은 국내 유일의 돌로 쌓은 왕릉이다. 왕릉 입구의 사자상을 지나 홍살문을 통과해 왕릉과 마주하면 엄숙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구형왕릉은 다른 왕릉과 차별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국 역사상 특별한 유적이다. 사적 제214호로, 자연석을 피라미드식으로 쌓아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일반 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층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해 만들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전구형왕릉

 

▲전구형왕릉

 

   구형왕릉은 아직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구형왕릉이 왕의 릉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자료가 없으나 왕릉이라 전해져 오고 있다. 전해져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약 200년전에 마을사람이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다 현재 왕릉의 아래쪽 왕산사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중 대들보 위에 커다란 상자가 있어 열어보니 옷, 칼, 활 등이 있어 구형왕릉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이 무덤을 둘러싸고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전구형왕릉

 

▲전구형왕릉

 

○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仲曰<武德>․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

19년,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 및 그의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막내 아들 무력과 함께 금관국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여 왔다. 왕이 예에 맞게 그를 대우하여 상등 직위를 주고, 금관국을 그의 식읍으로 주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전>

 

▲전구형왕릉

 

▲감실

 

仇衡王 金氏. 正光二年卽位, 治四十二年. 保定二年壬午九月, 新羅第二十四君眞興王, 興兵薄伐, 王使親軍卒, 彼衆我寡, 不堪對戰也. 仍遣同氣脫知爾叱今, 留在於國, 王子上孫卒支公等, 降入新羅. 王妃分叱水爾叱女桂花, 生三子, 一世宗角干, 二茂刀角干, 三茂得角干. 開皇錄云, 梁中大通四年壬子, 降于新羅.

구형왕 김씨, 정광 2년에 즉위, 처세는 42년 보정 2년 임오(562) 9월에 신라 제 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왕아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으므로 대전할 수 없었다. 이에 왕은 동기 탈지이즐금을 보내어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 등과 함께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진흥왕 때가 아니고 법흥왕 19년의 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김구해 충왕이 왕비 및 장남 노종,중남,무덕 계남 무력과 함께 신라에 항복했다고 되어있다.- 왕비는 분즐수이 즐의 딸 계화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각간, 둘째는 무도각간, 셋째는 무득 각간이다. 개황록에 보면, '양의 무제 중대통 4년 임자(532)에 신라에 항복했다.' 고 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능비

 

▲무인석

 

왕산(王山)은 (산음)현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산중에 돌을 포개서 만든 둔덕이 있고, 사면은 모두 층계로 되었는데 왕릉(王陵)이라는 전설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1 산음현산천조>

 

山陽縣之西隅, 方丈山東麓, 有山曰王山, 有寺曰王寺, 上有王臺[3], 下有王陵, 故曰王山, 知守護陵墓, 故王寺, 寺本王水晶宮也, 陵乃駕洛國第十葉仇衡王所예之玄宮也.

산양현(山淸)의 서편 모퉁이자, 방장산(智異山)의 동쪽 산록에, 산이 있으니 왕산(王山)이라 하고, 절이 있으니 왕산사(王山寺)라고 한다. 산상에는 왕대(王臺)[3]가 있고, 산하에는 왕능(王陵)이 있으므로 왕산이라 하며, 왕능 수호를 맡으므로 왕산사라하는데, 절은 본래 왕의 수정궁(水晶宮)이었고, 능은 이에 가락국 제10대 구형왕(仇衡王)께서 묻힌 무덤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1 산음현산천조>

 

▲문인석

 

▲문인석

 

신라 문무왕 16년, 서기 676년에 신하를 보내어 구형왕릉과 왕산사를 중수케 했고, 1021년에는 고려 신종이 산음현감을 시켜 왕산사를 보수케 했다.

 

<왕산사기>

 

왕산사가 임진왜란에 불탔던 것을 인조 2년, 서기 1624년에 인종 스님이 왕산사를 중수했으나 폐허가 되고 만 것을 효종 1년, 서기 1650년에 법영 스님이 왕산사를 다시 중수하고 구형왕의 위패를 땅에 묻었다.

 

<왕산사기>

 

▲무인석

 

▲호릉각(護陵閣)

 

   구형왕릉에 관한 기록들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이곳이 구형왕릉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 왕산사기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도 이미 2차 자료일 뿐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곳이 구형왕릉일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첫째, 신라에 나라를 바친 후 김해 지역을 식읍으로 받은 구형왕이 산청까지 와서 능을 만들 까닭이 없다. 둘째, 멸망한 나라 임금의 능을 이처럼 거대하게 만들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구형왕의 후손들이 이처럼 거대한 능을 만든다면 신라 조정에서는 반역으로 여겼을 것이다. 셋째, 역시 멸망한 나라의 왕릉을 새로운 양식으로 조성한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묘제는 어느 사회이건 가장 보수적인 제도이기에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호릉각(護陵閣)

 

▲'호릉각(護陵閣)' 편액

 

   그런데 구형왕릉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은데, 아주 신비로운 현상이 지금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왕릉 주변에 있는 칡넝쿨이 뻗어 나오다 그 넝쿨손이 왕릉의 돌담에 닿으면 더 이상 돌담을 타고 넘지 않고, 방향을 돌려 담 밖으로 되돌아 뻗어간다는 것과, 왕릉 주위의 활엽수들이 가을이면 낙엽을 떨어뜨리는데, 왕릉 안에는 한 잎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왕릉을 쌓아 올린 바위에는 새의 배설물이 전혀 없고, 새들도 왕릉 위로는 날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 눈으로 확인해 보니 이 같은 기이한 현상이 사실인 듯, 왕릉 안과 바깥이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깨끗히 정비돼 있어 왕릉의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단의 석층 중 5단에 네모난 구멍이 있는데 이곳으로 구형왕의 혼이 드나드는 문이라 전해져 오고 있다고 한다. 어런 모든 이야기들이 이 유적을 구형왕릉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011.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