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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발상지 - 중국 환인 비류수(혼강)

蔥叟 2011. 8. 29. 05:55

고구려 발상지 - 중국 환인 비류수(혼강)

  

   고구려의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비류수는 오늘날의 이름은 혼강이며 압록강의 지류이다. 오녀산에서 바라보면 주몽이 건너왔다는 비류수가 한눈에 넓게 펼쳐저 보인다. 비류수는 참으로 감탄을 자아낼만한 절경이다. 푸른 강물이 휘돌아드는 산자락의 절묘함이 어찌 저다지도 아름다운 곡선을 이룰 수 있을까 절로 감탄이 터진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오녀산성, 이곳을 감싸고 흐르는 비류수에 얽힌 고구려와 비류국과의 일화 등 역사의 의미를 새기며 바라다보니 신비로움이 더하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비류수의 계곡인 홀본(忽本)  서쪽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위나라의 관구검이 환도성을 쳐들어올 때 고구려군이 이 강에서 위나라군을 격파하기도 했었다. 또 미천왕이 왕이 되기 전에 큰아버지인 봉상왕에게 쫓겨서 소금장수 생활을 한 곳도 이곳 비류수 부근이었다. 

 

▲비류수

 

▲오녀산에서 바라본 비류수

 

○(주몽)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 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동명성왕>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동명성왕>

  

▲오녀산에서 바라본 비류수

 

비류수에 댐을 만들어 환인호가 되었다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毋丘儉>, 將萬人, 出<玄菟>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20년 가을 8월, 위 나라가 유주 자사 관구 검으로 하여금 1만 명을 거느리고 현토를 침공하게 하였다. 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미천왕[호양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을불[혹은 우불이라고도 한다.]이고, 서천왕의 아들 고추가 돌고의 아들이다. 예전에 봉상왕은 그의 아우 돌고가 모반할 생각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그를 죽였다. 그의 아들 을불은 자기에게도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도망했었다. 처음에는 수실촌 사람 음모의 집에서 머슴 생활을 하였다. 음모는 을불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고 힘든 일을 시켰다. 그 집 옆의 연못에서 개구리가 울면, 음모는 개구리 소리가 나지 않도록 을불로 하여금 밤마다 기와 조각과 돌을 던지게 하였고, 낮이면 나무를 해오라고 독촉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 을불은 고생을 이기지 못하고 일년만에 그 집을 떠났다.

 

 

▲비류수

 

 

▲비류수

 

   을불은 동촌 사람 재모와 함께 소금 장사를 하였다. 배를 타고 압록에 가서 소금을 가지고 내려와 강의 동쪽 사수촌 사람의 집에 머물었다. 그 집 노파가 소금을 요구하여, 한 말 가량 주었다. 그러나 그 노파는 그 이상 주기를 요청하였다. 을불은 주지 않았다. 그러자 노파가 그를 미워하여 몰래 자기의 신발을 소금 속에 묻었다. 을불은 이를 모르고 소금을 지고 길을 떠났다. 노파가 쫓아와 신발을 찾아들고, 을불이 자기의 신발을 감추었다고 거짓으로 압록 성주에게 고발하였다. 성주는 신발 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노파에게 주고, 을불에게 매를 때린 후 석방하였다. 이리하여 을불은 얼굴이 여위고 의복이 남루하여, 누구든 그가 왕손임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고자 하여, 먼저 북부 조불과 동부 소우 등을 파견하여, 온 나라에서 을불을 찾게 하였다. 그들이 비류하 물가에 도착하였을 때, 한 사나이가 배에 있었는데 얼굴은 비록 초췌하였으나, 행동 거지가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 아닌가 생각하고, 그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말했다.

“지금 국왕이 무도하므로 국상이 군신들과 함께 왕을 폐하려고 합니다. 왕손께서는 행동이 검소하고 인자하며 사람을 사랑하므로, 조상의 유업을 이을 수 있다 하여, 저희들을 보내 맞아 오게 하였습니다.”

을불이 의심하여 말했다.

“나는 평민이오 왕손이 아닙니다. 달리 알아 보시오.”

소우 등이 말했다.

“지금 왕이 인심을 잃은지 오래여서, 실로 나라의 주인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이로 인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컨대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류수

 

▲비류수

 

그들은 곧 을불을 받들어 돌아왔다. 조리가 기뻐하며 을불을 조맥 남쪽 인가에 머물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가을 9월에 왕이 후산 북쪽에서 사냥할 때 국상 조리가 따라갔다. 조리가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와 마음이 같은 자는 내가 하는 대로 하라.”

그는 곧 갈대잎을 모자에 꽂았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라 갈대잎을 꽂았다. 조리는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그들과 함께 왕을 폐하여 별실에 가두고,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곧 왕손을 맞아 옥새를 올려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四年, 冬十二月, 王出師, 伐<扶餘>, 次<沸流水>上, 望見水涯, 若有女人, 舁鼎游戲. 就見之, 只有鼎. 使之炊, 不待火自熱, 因得作食, 飽一軍. 忽有一壯夫曰: “是鼎吾家物也, 我妹失之, 王今得之, 請負以從.” 遂賜姓<負鼎>氏. 抵<利勿林{理勿林}> 宿, 夜聞金聲. 向明, 使人尋之, 得金璽兵物等, 曰: “天賜也.” 拜受之. 上道有一人, 身長九尺許, 面白而目有光. 拜王曰: “臣是<北溟>人<怪由>. 竊聞大王北伐<扶餘>, 臣請從行, 取<扶餘>王頭.” 王悅許之. 又有人曰: “臣<赤谷>人<麻盧>, 請以長矛爲導.” 王又許之

▲비류수

 

▲비류수

 

4년 겨울 12월, 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부여를 공격하러 가는 도중에 비류수 옆에 머무르며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어떤 여인이 솥을 들고 유희를 하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여인은 없고 솥만 있었다. 왕이 그 솥에 밥을 짓게 하니, 불을 때기도 전에 솥이 저절로 뜨거워졌고, 이에 따라 밥을 짓게 되어 모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이 때 갑자기 건장한 한 사나이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 솥은 우리 집 물건이었는데, 제 누이가 잃었다가 이제 왕께서 얻었으니, 제가 이 솥을 지고 왕을 따라가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곧 그에게 부정(負鼎)씨라는 성을 주었다.

 

왕이 이물림에 도착하여 묵게 되었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을 무렵에 사람을 시켜 그곳을 찾는 중에 금으로 만든 옥새와 병기 등을 얻었다. 왕이 “이는 하늘이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절을 하고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키는 9척 가량이었으며, 얼굴이 희고 눈에서 광채가 빛났다. 그는 왕에게 절을 하고 “저는 북명 사람 괴유입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친다하니 제가 따라 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또한 어떤 사람이 “저는 적곡사람 마로입니다. 긴 창을 들고 길을 인도하게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이 이를 또한 허락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비류수

 

 

 

<2011.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