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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가는 길 - 중국 목단강 발해 상경용천부 외성

蔥叟 2011. 10. 12. 05:00

발해 가는 길 - 중국 목단강 발해 상경용천부 외성

   

  발해의 상경용천부는 현재 길림성 연안현 동경성에 있는 옛 성터가 그 유적이다. 발해는 수도를 여러 번 옮겼다. 천도의 겉 사정은 영토의 확장 등 정책 또는 전략적인 면에 있지만 내부의 갈등이라든지, 토호세력의 발호 등 적지 않은 속사정도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제3대 문왕(文王)은 구국(舊國)인 동모산(東牟山)에서 742년 중경 현덕부로 수도를 옮겼다. 고왕(대조영)과 무왕(武王 · 대무예)의 무치시대를 접고 문치시대를 연 문왕(대흠무)는 해란강 유역의 개척을 위해 중경 현덕부로 천도했다가 755년, 상경 용천부로 또 수도를 옮겼다. 흑수 말갈의 제압과 목단강 유역으로의 진출 등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함이다. 세 번째로 상경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로 천도했다가 794년, 30년 만에 다시 상경으로 되돌아갔다. 이것이 네 번째 천도이고 상경은 발해가 멸망한 926년까지 수도가 되었다. 따라서 상경 용천부는 발해 정치사의 중심지라고 할 만하다. 이후 거란이 발해의 옛 당에 괴뢰국인 동단국을 세워 수도로 정했고, 그 이름을 천복성(天福城)으로 고쳤다. 홀한하(목단강) 유역에 있었던 탓에 <요사>에는 홀한성이라 칭했다.

 

▲외성 동출입문

 

▲발해상경용천부유지 표석

 

▲발해국상경영천부유지 표석

 

▲발해국상경영천부유지 표석

 

▲발해국상경영천부유지 안내문

 

▲발해국상경영천부유지 안내문

 

▲발해상경용천부유지 안내도

 

○祖榮卽竝比羽之衆, 據挹婁之東牟山

대조영이 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여 읍루족이 살았던 동모산을 거점으로 삼았다.

 

○聖曆中, 國號震(新唐書作振, 文獻備考曰震朝), 自立爲震國王, 築忽汗城以居

성력(698~699)연간에 나라이름을 진(신당서에는 振이라 하였고, 문헌비고에는 震朝라 하였다)이라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진국왕이 되었다. 홀한성을 쌓고 살았다.

(성력원년이 발해가 건국한 698년이며, 홀한성은 상경성을 말한다.)

 

<발해고 군고 고왕조>

 

▲외성

 

▲외성

 

▲외성

 

▲외성

 

▲외성

 

○天寶末, 徒上京

천보(742~756)말년에 상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貞元中, 復徒東京

정원연간(785~805)에 다시 동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문왕이 793년 3월에 사망하였으므로 동경으로 천도한 것은 785~793년 사이가 되어 실제로는 정원초반에 해당한다.)

 

<발해고 군고 문왕조>

 

○改元中興, 還上京

중흥(794~795)으로 연호를 고치고, 상경으로 도읍을 되돌렸다.

 

<발해고 군고 성왕조>

 

▲외성

 

▲외성

 

▲외성

 

▲외성

 

▲외성

 

   외성은 총둘레가 16,296.5m나 되는 직사각형으로 동서남북 네 성벽에 모두 10개의 성문을 내었고 성벽에는 해자를 빙둘러 파놓았다. 외성은 동서로 긴 장방형을 띠고 있다. 성벽은 몸체는 돌로 쌓고 겉에 흙을 씌운 토석 혼축식 성벽이다. 성벽의 높이는 비교적 잘 남아있어 3m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북쪽성벽은 그 모양이 凸모양으로 튀어나와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길이는 4,946m이다. 외성에는 해자의 흔적이 나타난다. 발해의 외성인 토성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주저앉았다. 길이 16km에 달하는 토성 둑에는 느릅나무,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울창하다. 전성기 때에는 80~120만 정도의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당의 수도 장안도 100만 정도의 인구가 살았다고 하니 성경용천부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수 있다. 하지만 워낙 넓은 구역이라 전체적인 발굴은 엄두를 내지못한다.

 

▲외성 남동벽 

 

▲외성 남벽 

 

▲외성 동벽 

 

▲외성 남벽 

 

▲외성 남동벽 

 

   상경성의 교통망을 살펴보면, 가장 넓은 간선도로를 기본으로 하여 남북으로 그와 평행되는 4개의 도로와 동서로 수직되는 7개의 도로가 성안을 바둑판 모양으로 갈라놓았다. 길의 너비는 그 위치와 중요성에 따라 서로 다르게 하였는데, 그 중 가장 넓은 것은 외성 성벽의 가운데 문과 황성 남문을 이은 길이다. 이 길로 황성을 거쳐 궁성으로 들어간다. 이 길은 여러 길 가운데서 맨 복판에 놓인 가장 중요한 길로서 그 너비는 110m나 되어 당나라 장안성의 주작가와 같다. 다시 가로 세로 뻗은 길들에 의해 외성안이 여러개 구역으로 나뉘어졌는데 당시 그 구역들에는 도시주민들이 살던 집들과 절간·시장들이 있었을 것이다.

 

▲외성 남동벽 

 

▲외성 서벽 

 

▲외성 남서벽 

 

▲외성 서벽 

 

▲외성 남벽

 

   상경성 터는 워낙 넓기 때문에 그 안에 여섯 개의 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중 가장 큰 것이 발해진이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바로 발해인들이 살던 집 터 위에 다시 집을 짓고 사는 셈이다. 여기에 있는 중학교의 이름도 발해중학이다. 이것은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도성의 규모와 거의 동일하다. 상경성은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지였던 당나라 수도 장안성을 본 떠 만든 것으로써, 그 규모로 볼 때 8·9세기 당시에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성이었다.

 

▲발해국상경영천부유지 외성 성벽

 

▲발해국상경영천부유지 외성 성벽

 

▲발해국상경영천부유지 외성 성벽

 

 

 

<2011. 8.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