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 12. 05:58ㆍ◈한국문화순례◈/북방문화권
고구려 가는 길 - 중국 집안 환도산성
환도산성은 국내성에서 2.5 km 거리에 있는 성으로 둘레가 6951 m에 이를 정도로 비교적 규모가 크다. 당시 환도산성은 전쟁 때 피신한 왕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남쪽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하(通溝河)가 흘러 일종의 해자(垓字) 역할을 하는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국내성에서 불과 2.5km 떨어진 곳에 이러한 성을 쌓은 것은 고구려인들의 전투적 성격 때문이다. 고구려인들은 유사시 수도근처로 도읍지를 옮겨 적군과 장기전을 펼칠 수 있는 수비성을 두었는데, 그러한 성들 중 하나가 환도산성이었다. 이처럼 고구려 수도의 성은 평지에 성이 있고, 그 뒤편 산에 산성이 있어 서로 짝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첫 수도인 오녀산성은 평지성인 하고성자성과 짝을 이루고 세 번째 수도인 안학궁성 역시 대성산성과 짝을 이루고 있다. 그러다가 평원왕(586년) 때 네 번째 수도가 된 장안성의 경우 궁성 외곽에 튼튼한 성벽을 쌓아 산성과 평지성의 구분이 비로소 없어졌다.
▲환도산성 남문성벽
▲환도산성 남문성벽
환도산성은 해발 676m 인 산성자산에 의지하여 쌓은 삼태기 모양의 성이다. 산성의 총 길이는 약 7km 정도이고 고구려의 전형적인 포곡식(包谷式) 산성의 형태를 띠고 있다. 포곡식 산성이란 내부에 계곡이 있고 주위에 산 능선이 있어서, 능선의 경사와 절벽 등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을 말한다. 성벽은 잘 다듬은 쐐기 모양의 성돌을 사용하여 5m 정도 높이로 정교하게 쌓았으며, 남문지구간과 서문등 문지가 있는 곳은 협축으로 그 외의 구간은 편축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위에는 1m 정도 높이의 평여장이 남아있으며 여장의 앞쪽에는 대략 1.5-2m 간격으로 주통(柱桶)이 구축되어 있다. 주통의 크기는 환도산성과 마찬가지로 가로 30cm, 세로 25cm 깊이 30-55cm 정도이다.
성문은 모두 7개인데 동쪽과 북쪽, 남쪽에 각각 2개씩 있고, 서쪽에 1개가 있다. 발굴조사 결과 남문은 서문과 같은 형태의 옹성문 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훼손상태가 심하여 정확한 구조를 알 수 는 없지만 성문 주변에서 많은 양의 기와가 출토되어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성내의 가장 저지대에 속하여 성벽에는 4개의 배수구가 구축되어 있다. 배수구 장방형으로 너비 0.8m, 높이 1.4m, 길이 13m 정도이며 입수구와 출수구의 레벨 차이가 크지 않아 바닥은 자연스럽게 경사면을 유지하도록 구축하였다.
남문지 2호는 비교적 잔존상태가 양호한 옹성구조를 갖추고 있다. 문구부는 바닥에 쇄석이 깔린 개거식이며 너비는 5.4m 길이는 8.4m 정도이다. 옹성은 길이 19m 두께 3.7-6.5m 정도이며 긴 자루형태이다. 서문은 해발371m 서쪽성벽의 서남단에 위치하며 소봉의 정상부에 구축되어 있다. 성문은 개거식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너비는 3.6m 길이는 5.25m 이며 생토면을 다듬고 성벽을 구축하였으며, 개구부의 내외모서리 부분은 원형으로 처리하였다.
▲환도산성 성벽
▲환도산성 성벽
환도산성은 10대 산상왕 때 처음으로 축성되었다. 그리고 같은 왕 13년에도 도읍지가 되기도 하였다. 11대 동천왕 20년 위나라관구검의 침입으로 함락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는데 고구려 70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수도를 침공당한 치욕적 사건이다.
○二年, 春二月, 築<丸都城>.
2년 봄 2월, 환도성을 쌓았다.
○十三年, 冬十月, 王移都於<九都{丸都}> .
겨울 10월, 왕이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
○20년 가을 8월, 위 나라가 유주 자사 관구 검으로 하여금 1만 명을 거느리고 현토를 침공하게 하였다. 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군사를 이끌어 양맥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여, 역시 적군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위 나라의 대병력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다. 관구 검이란 자는 위 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날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려 있구나.”
왕은 곧 철기 5천 명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관구 검이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자,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사망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왕이 기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원으로 도주하였다.
겨울 10월, 관구 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도륙하였다. 그리고 곧 장군 왕 기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은 남옥저로 도주하다가 죽령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모두 없어지고, 다만 동부의 밀우가 혼자 왕의 옆에 있다가 왕에게 말했다.
“지금 추격해오는 적병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이를 피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제가 결사적으로 적군을 방어하면, 왕께서는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결사대를 모아 그들과 함께 적에게 달려들어 전력을 다하여 싸웠다. 왕은 사잇길로 가다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호위토록 하였다. 왕은 군사들에게 말했다.
“만약 밀우를 찾아 올 수 있는 자가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
하부 유옥구가 앞으로 나와서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곧 전장으로 가서 땅에 쓰러져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 등에 업어 왔다. 왕은 자신의 다리에 밀우를 눕혔다. 밀우는 한참이 지나서야 소생하였다. 왕은 다시 사잇길을 전전하며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 나라 군사는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적절한 계책도 없고 형세가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동부 사람 유유가 나와 말했다.
“형세가 위급하다고 하여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제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 나라 군사를 위로하다가, 기회를 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저의 계책대로 되면, 그 때 왕께서 적을 맹렬히 공격하여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좋다”고 말하였다.
▲환도산성 성벽
▲환도산성 배수구
유유가 위 나라 군중에 들어가서 항복을 가장하고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바닷가로 도망하였으나, 이제 왕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장차 귀국의 진영에 항복하여 귀국의 법관에게 죽음을 맡기려 하는데, 저를 먼저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 군사들을 대접하게 하였습니다.”
위 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이 때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 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 나라 군사는 곧 혼란에 빠졌다.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습하였다. 위 나라 군사들은 혼란 속에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에서 퇴각하였다. 왕은 귀국하여 공적을 평가하였다. 밀우와 유유는 1등이었다. 밀우에게는 거곡과 청목곡을 주고, 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하고, 유유에게는 구사자를 추증하고, 또한 유유의 아들 다우를 대사자로 삼았다. 이 전쟁 시에 위 나라 장수가 숙신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전공을 새겨 기념하고, 또한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에 기념비를 새기고 돌아갔다.
예전에, 왕의 신하 득래는,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이를 중단하기를 수차례 간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득래는 탄식하며 “머지 않아 이 땅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위 나라 장수 관구 검이 군사들로 하여금 그의 무덤을 헐지 말며 무덤의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하고, 그의 처자들을 찾아 모두 풀어 주도록 명령하였다.[「괄지지」에는 “불내성은 곧 국내성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
21년 봄 2월, 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겪었으므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이라는 지방은 본래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어떤 사람은 왕이 왕검성에 도읍을 정했다라고도 말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환도산성 성벽
▲환도산성 성벽
환도산성은 상당기간 동안 고구려 수도였다. 고국원왕 때에도 왕성으로 기능했었다. 하지만 고구려 역사상 외세와의 싸움에서 두번이나 수도를 내주었던 비운의 왕성이었다.
○十二年, 春二月, 修葺<瓦都城{丸都城}> , 又築<國內城>. 秋八月, 移居<丸都城>.
12년 봄 2월, 환도성을 보수하고,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왕이 환도성으로 옮겨 왔다.
○겨울 10월, 연 나라 임금 황이 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 장군 한이 황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다음에 우문씨를 멸해야만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었다.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다. 따라서 사람들은 항상 북쪽 길을 선택하였다. 한이 말했다. “적국은 일반적으로 상황을 고려하여, 우리 대군이 반드시 북쪽 길로 오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북쪽 길을 중시하고 남쪽 길을 가볍게 취급할 것입니다. 왕께서 응당 정예 부대를 이끌고 남쪽 길로 가서 불의의 공격을 하면, 북쪽 도성은 공격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별도로 소부대를 북쪽 길로 보내면 다소 차질이 있더라도, 그들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사지를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황은 이 말을 따랐다.
11월, 연 나라 임금 황이 직접 강병 4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진군하였다. 모용 한과 모용 패를 선봉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 왕 우 등으로 하여금 군사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진군하게 하여,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다. 왕은 아우 무로 하여금 정예 부대 5만을 이끌고 북쪽 길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어하였다. 이 때 모용 한 등이 먼저 와서 전투를 벌였고, 연이어 황의 대군이 도착하였으므로,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좌장사 한 수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를 죽이자, 모든 적들이 승기를 타고 드디어 환도성으로 쳐들어왔다. 왕은 단기로 단웅곡으로 도주하였다. 연 나라 장군 모여니가 따라와서 왕모 주씨와 왕비를 잡아 돌아갔다. 이 때 연 나라 장군 왕 우 등은 북쪽 길에서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황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왕을 불렀다. 왕은 가지 않았다. 황이 돌아가려 할 때 한 수가 말했다.
“고구려 땅은 우리가 남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임금이 도주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잠복하였으나, 우리 대군이 철수한 뒤에는, 틀림없이 다시 모여 나머지 군사를 수습할 것입니다. 이는 족히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구려 왕의 아버지의 시체를 싣고, 그의 생모를 사로잡아 돌아갔다가, 고구려 왕이 제 발로 와서 사죄하기를 기다린 후에 돌려주어, 은혜와 신의로써 무마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황이 그 말에 따라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대궐 창고에 있는 역대 보물을 탈취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 버리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환도산성 성벽
▲환도산성 성벽
두번의 외침으로 점령당하긴 했지만 환도산성을 완전히 빼앗아 지배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환도산성은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도 계속 전략적 요충지로 남아있었다.
○四年, 秋九月, <丸都>進嘉禾.
가을 9월, 환도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十三年, 冬十月, <丸都城><干朱理>叛, 伏誅.
13년 겨울 10월, 환도성의 간주리가 모반하여 처형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양원왕>
이처럼 환도산성에는 모반을 꾀할 만큼 강력한 군대가 계속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1.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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