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첨성대
"삼국사기 분석 결과 첨성대는 천문대였다"는 학설이 제기되었다. 한국천문연구원 김봉규 박사는 5일 "신라시대 축조된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고 밝혔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첨성대가 상징적인 건물이라거나 제사를 지내던 제단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또한 지금까지는 결정적 증거 없이 그저 막연하게 첨성대가 천문대라고 말해왔지만, 신라가 남긴 삼국사기 기록들이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첨성대(사진 박임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증보문헌비고 등에 실린 고대 천문관측기록을 분석한 결과, 첨성대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덕왕 9년(640년) 이후 기록된 유성의 떨어진 위치들이 모두 첨성대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는 첨성대에서 유성을 관측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한다.
또 첨성대가 완성된 이후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의 수가 이전보다 10배 이상 증가했으며 기록된 내용도 매우 정밀해졌다. 즉, 진흥왕2년(541년)부터 선덕왕 9년(640년)까지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이 3건에 불과했지만, 첨성대 축조 예상시점인 선덕왕 10년(641년)부터 효성왕 4년(740년)까지의 기록은 38건에 달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부터 살펴보자. 먼저 첨성대가 축조되기 전으로 추정되는 541년부터 640년까지의 기록이다.
○八年, 夏五月, 雷震, 星殞如雨.
8년 여름 5월, 뇌성과 벼락이 치고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五十三年, 秋七月, 土星犯月.
53년 가을 7월, 토성이 달을 범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전>
▲첨성대의 위치
▲첨성대의 명칭 및 크기
이어서 첨성대가 축조된 후로 추정되는 641년부터 740년까지의 기록이다.
○元年, 秋八月, 彗星出於南方, 又衆星北流.
원년, 가을 8월, 혜성이 남쪽에 나타나고, 또한 별 무리가 북쪽으로 흘러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왕전>
○十年, 十二月, 土星入月. 京都地震.
12월, 토성이 달에 들어가고,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十二年, 九月, 彗星七出北方.
12년 9월, 혜성이 일곱 번 북방에 나타났다.
○十三年春正月, 大星隕<皇龍寺>, <在城>中間(+地震)
13년 봄 정월, 큰 별이 황룡사에 떨어지고, 재성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十六年, 秋七月, 彗星出北河․積水之間, 長六七許步.
16년 가을 7월, 혜성이 북하와 적수 두 별 사이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6,7보 가량 되었다.
○十九年, 夏四月, 熒惑守羽林. 六月, 太白入月, 流星犯參大星. 秋八月, 太白入月.
19년 여름 4월, 화성이 우림을 지키고, 6월에 금성이 달에 들어가고, 유성이 삼대성을 범하였다. 가을 8월, 금성이 달에 들어 갔다.
○二十一年, 夏五月, 地震. 流星犯參大星. 六月, 天狗落坤方.
21년 여름 5월, 지진이 있었다. 유성이 삼대성을 범하였다. 6월 천구성이 서남방에 떨어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전>
▲첨성대의 구조
▲첨성대의 기단석 평면도
○二年, 夏五月, 太白犯月.
2년, 여름 5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
○三年, 冬十月, 彗星出五車.
3년 겨울 10월, 혜성이 오거 성좌에 나타났다.
○四年, 冬十月, 自昏及曙, 流星縱橫.
4년 겨울 10월, 저녁부터 새벽까지 유성이 어지럽게 날아 다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전>
○八年, 春二月, 白氣竟天, 星孛于東.
8년 봄 2월, 흰 기운이 하늘에 뻗쳤고, 동쪽에 혜성이 나타났다.
○九年, 六月, 歲星入月.
9년 6월, 세성이 달에 들어 갔다.
○十年, 春二月, 彗星入月.
10년 봄 2월, 혜성이 달에 들어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효소왕전>
▲첨성대 1단 평면도
▲첨성대 12단 평면도
○七年, 夏四月, 鎭星犯月.
7년 여름 4월, 토성이 달을 범하였다.
○九年, 春正月, 天狗隕<三郞寺>北.
9년 봄 정월, 삼랑사 북쪽에 천구가 떨어졌다.
○十四年, 秋九月, 太白掩庶子星. 冬十月, 流星犯紫微. 十二月, 流星自天倉入大微.
14년 가을 9월, 금성이 서자성을 가렸다. 겨울 10월, 유성이 자미성을 범하였다. 12월, 유성이 천창으로부터 태미성좌로 들어갔다.
○十五年, 春正月, 流星犯月, 月無光.
15년 봄 정월, 유성이 달을 범하자 달이 빛을 잃었다.
○十七年, 冬十月, 流星自昴入于奎, 衆小星隨之, 天狗隕艮方.
17년 겨울 10월, 유성이 묘성으로부터 규성으로 들어가자, 여러 작은 별들이 이를 따라 들어갔고, 천구가 동북방에 떨어졌다.
○三十四年, 春正月, 熒惑犯月.
34년 봄 정월, 화성이 달을 범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전>
○원년 秋九月, 流星入大微.
가을9월, 유성이 태미 성좌에 들어 갔다.
○四年, 夏五月, 鎭星犯軒轅大星.
4년 여름 5월, 토성이 헌원 성좌의 큰 별을 범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효성왕전>
▲첨성대 14단 평면도
▲첨성대 27단 평면도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첨성대 축조 전의 기록이 막연하고 간단한 내용이지만, 첨성대 축조 후의 기록에는 별이 나타난 위치와 사라진 위치 등이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기록돼 있다. 첨성대 완공시기는 선덕왕 말기인 640년대로 추정된다. 선덕왕 즉위년부터 한동안 천문기록이 없다가 선덕왕이 사망한 647년에 갑자기 천문기록이 많아진 것으로 보아 그렇게 여겨진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의 천문대인 관천대의 상단 모습이 첨성대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관천대가 첨성대를 본 떠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첨성대가 만들어진 후 기록된 유성의 낙하 지점이 모두 첨성대를 둘러싸고 있는 점도 첨성대에서 천체를 관측했다는 증거로 보인다. 647년 이후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경주 지방의 유성관측기록은 모두 다섯 차례. 반월성에 2개, 황룡사와 반월성 사이, 삼랑사 북쪽과 황룡사 남쪽에 각각 1개씩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유성 낙하 지점은 첨성대에서 반경 2㎞ 이내에 위치한다. 특히 첨성대가 완성된 후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 수가 10배 이상 증가한 것과 질적으로 정밀해졌다는 점도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첨성대 29단 평면도
▲첨성대 평면도
실제로 541~640년에 3건에 불과하던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은 641~740년에 38건으로 급증했다. 반면 이 기간 고구려나 백제의 천문관측 기록은 총 5건에서 4건으로 오히려 줄었다. 첨성대가 만들어진 후부터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은 질적인 면에서도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혜성처럼 누구나 관측할 수 있는 천문현상은 상대적인 비율이 줄고 대신 행성이 달 뒤로 숨는 현상이나 순간적인 유성 출현 등 전문적인 천문학자들이 매일 밤 관측해야 얻을 수 있는 기록이 많아졌다. 이 같은 증거로 볼 때 첨성대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일 가능성은 높아진다.
○秋九月天赤大星自北流東南
가을 9월, 하늘에 붉은 빛이 돌았고, 큰 별이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자비마립간 10년조>
○冬十月流星自昴入于奎衆小星隨之天狗隕艮方
겨울 10월 유성이 묘성으로부터 규성으로 들어가자, 여러 작은 별들이 이를 따라 들어갔고, 천구가 동북방에 떨어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17년조>
▲첨성대의 기울어진 거리
또한 신라가 첨성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천문과 관련된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보아, 첨성대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아님을 확고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立秋後辰日, <本彼遊村>祭<靈星>
입추 후 진(辰)일에 본피유촌에서 영성(靈星)에 제사를 지냈었다.
<삼국사기 잡지제1 제사조>
○<文熱林>行, 日月祭; <靈廟寺>南, 行五星祭;
문열림에서는 일월제를 지냈고, 영묘사 남쪽에서는 오성제를 지냈다.
<삼국사기 잡지제1 제사조>
첨성대가 천문과 관련된 제단이었다면 굳이 본피유촌이나, 문열림 영묘사 등지에서 천문관련 제사를 지낼 까닭이 있었을까?
<2011.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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