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몽산리 석조여래좌상
몽산리 석조여래좌상은 태안군 청계산 기슭에 위치한 죽사(竹寺)의 절터에 있으며 전체 높이는 1.03m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 입고 있으며, 양 발을 무릎 위로 올려 발바닥이 하늘을 향한 자세로 앉아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올려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했다.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불상의 뒤에는 불꽃무늬로 장식한 배(舟)모양의 광배(光背)가 있는데, 그 안쪽에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2줄의 굵은 선으로 구분하였다. 머리광배에는 연꽃을 겹으로 새겼고, 머리광배와 몸광배가 구분되는 좌우에는 구름무늬 위에 비천상(飛天像)을 새겼다. 광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조각기법이 잘 나타나고 있다.
대좌(臺座)의 아래쪽에는 아래로 향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고, 위쪽에는 활짝 핀 모양의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연꽃무늬는 겹겹으로 된 꽃잎과 그 사이에 잎을 갖추고 있는데, 이것 역시 통일신라시대 대좌 장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수한 세월동안 풍파를 겪은 듯한 이 불상에는 조성에 관련해 재미있는 영험이야기가 대대로 내려오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 몽산리에는 제법 많은 집들이 촌락을 이루어 바다에서 고기를 잡기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한 젊은이가 바닷가로 나가 낚시를 하다가 이상한 물체가 물에 둥둥 떠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언듯 보기에는 사람 같은데 뭘까?” 그 물체가 뭍으로 밀려와 자세히 보니 큼직한 불상이었다. “이상하구나. 분명 돌부처님인데 어떻게 바다에 뜬 체로 밀려온단 말인가?”
다시 썰물이 되어 모래밭에는 돌부처님만 남았다. 젊은이는 다가가 돌부처님을 들어보았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참 이상도 하구나. 이렇게 무거운 부처님이 어떻게 물에 떠서 밀려왔단 말인가?”고개를 갸우뚱하며 마을로 돌아온 젊은이는 어른들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모두들 못 믿겠다는 말을 하며 면박을 주었다. “자네, 뭘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것 아닌가? 그 부처님은 분명 나무로 만든 부처님일 것이야.”
젊은이는 영 믿지 못하겠다면서 함께 현장에 가 보자고 제안을 했다. 이리하여 동네 사람들 여럿이 바닷가로 달려갔다. 과연 거기에는 돌부처님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흰빛을 띤 돌부처님은 사람 몸보다 더 커서 굉장히 무거워 보였다. 함께 간 사람들은 처음 본 젊은이의 말에 수긍하며 신비한 돌부처님을 모셔오기로 작정하고 여럿이 들어올렸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그때 같은 마을에 박씨 성을 가진 젊은이가 나섰다. 그 젊은이는 병약해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약골청년이었다. “제가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만류했다. “야, 이 사람아. 우리 같은 장골 여럿도 못 들어 올리는 돌부처님을 어떻게 자네 같은 약골이 들어 올린단 말인가. 허리 다치기 전에 그만두게나.”
하지만 박씨 청년은 그만 둘 때 그만 두더라도 한번 들어보겠다며 돌부처님 앞으로 다가왔다. 마을 사람들은 박씨 청년을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박씨 청년은 돌부처님을 가랑잎 들듯이 번쩍 들더니 등에 업었다. “아니, 저 저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
깜짝 놀란 마을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사람이 도술을 부리나?”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대책을 논의했다. "분명 저 부처님은 우리 마을에 행운을 가져다주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야. 그러니 박씨 자네가 부처님을 마을로 모시게.”
돌부처님을 가뿐하게 들어 올린 박씨 청년은 이 동네에서 효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더욱이 이 청년은 박씨 가문의 9대 독자로 병약해 부모님은 일찍 결혼시켜 대를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씨 청년의 꿈에 돌부처님이 나타나 자신이 지금과 똑같은 상황을 재현해 보여 주었던 것이다. 부처님도 효자를 알아보는 듯했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박씨 청년은 돌부처님을 업고 마을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 마을 사람들이 따라왔다. 한참을 걸어오자 박씨 청년은 다리가 아팠다. 언덕에 이르러 박씨 청년은 돌부처님을 내려놓고 잠시 휴식에 들어갔다. 뒤에서 함께 따라오던 마을 이장이 말했다.
▲광배
▲화불
“부처님을 모시려면 절을 잘 지어야 해. 우리 마을 소목골이 절터로는 제격이야. 거기에 절을 세우세.”다시 박씨 청년은 마을 이장이 시키는대로 돌부처님을 업고 동네 어귀인 소목골로 향했다. 그곳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며 사방이 둘러싸여 아늑했다. "다 왔으니 돌부처님을 내려놓겠습니다.”
돌부처님이 머물 자리를 정한 뒤 마을 사람들은 십시일반 돈을 보태 절을 짓고 여러 명이 돌부처님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박씨 청년을 불러 돌부처님을 옮기도록 했다. 박씨 청년이 돌부처님을 가볍게 들어 올려 대웅전으로 옮겼다. 이렇게 해서 지은 절 이름을 죽사(竹寺)라고 불렀다.
죽사가 지어진 뒤 박씨 청년은 연이어 여섯 아들과 딸을 낳아 그동안 독자로 내려오던 집안의 대를 풍성하게 이었다. 이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아들을 못 낳은 사람들이 치성을 드려 아들을 낳기도 했다. 죽사가 흥성해진 어느 해 한밤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사찰 구석구석을 뒤져 가져갈만한 물건을 찾았다. 하지만 청빈한 절 살림이라 값나가는 게 없었다. “젠장, 아무리 절간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가난할 수가 있나. 듣던 말로는 사람이 많이 찾는다고 하기에 부자절인 줄 알았더니 이게 뭐람.”
하는 수 없이 도둑은 부엌에 걸린 가마솥이라도 뜯어 가기로 마음먹었다. 도둑은 가마솥을 번쩍 들고 문을 나왔다. 그리고는 누가 볼세라 조심조심 문을 닫고는 산길을 따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듯했다. 그래서 한발을 떼어놓고 뒤를 돌아다보고 또 한발을 떼어놓고 뒤를 돌아다보면서 걸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다 볼 때는 아무도 없었다.
“왜 이렇게 내가 겁을 먹지? 분명 내 뒤에 누가 따라오는 것 같은데….”한참을 도망간 도둑은 ‘이 정도면 절에서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한숨쉬었다 가야겠다.”도둑은 솥을 내려놓고 땀을 닦았다. 그리고 잠시 앉아 있으니 졸음이 왔다. 무거운 솥을 메고 산길을 걸어왔으니 당연히 피곤했다. 잠을 이기지 못한 도둑은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한참동안 깊은 잠을 잔 도둑은 깨어나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은 다름아닌 죽사 공양실 안이었다.
▲화불
▲대좌
“아니, 여기가 어디야. 그토록 멀리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다시 사찰 부엌이란 말인가?”때마침 법당에서 예불을 드리고 내려온 스님이 공양실 문을 열자 그 안에 도둑이 솥을 옆에 두고 앉아 있었다. 기도스님은 대중스님들을 깨워 솥을 떼어 가려던 도둑을 붙잡았다. 그러자 도둑은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빌며 자신이 겪었던 일을 낱낱이 고했다.
“사실 저는 어젯밤에 이곳에 들어와 솥을 뜯어 달아났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자꾸 뒤를 따라오는 듯해 멀리 도망친 후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다시 사찰 부엌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를 따라온 그림자는 저 법당 안에 있는 돌부처님 같았습니다. 이제 저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님들과 함께 부처님을 모시고자 하니 허락해 주십시오.”
이야기를 들은 스님들은 도둑이 진심으로 참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부처님 제자가 되는 것을 허락해 함께 오랫동안 정진하며 불도(佛道)를 닦았다고 한다. 이야기 속의 죽사는 현재 폐사되었으며 그 터에 석가여래좌상만 남아 있다.
<2010.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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