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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탑순례 - 청도 운문사 전탑터

蔥叟 2009. 12. 21. 08:37

전탑순례 - 청도 운문사 전탑터

     

  운문사는 청도에 있는 고찰로 북편으로 열린 긴 골짜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운문사는 원광법사가 머물렀던 사찰이었으며, 또한 고려말에는 일연스님이 이곳에서 '삼국유사' 집필을 위한 자료수집과 정리를 하였을 만큼 유서깊은 곳이다.

 

▲작압전

  

▲작압전 편액

 

▲작압전 옛모습

 

  운문사의 전탑은 다행히 그 탑지는 정확히 알 수 있으나, 탑 자체였던 작압전은 현재 완전히 개수되어 옛 모습을 상실하였다. 개수전의 사진에도 1층옥식 정도만 확인할 수 있으나, 그 구조에 있어 현존 중국의 거대전탑처럼 1층에서부터 상층부까지 사다리를 통하여 오르내릴 수 있는 구조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탑지에서는 작압전의 해체복원 당시 이곳에 봉안되어 있던 석불좌상의 대좌 밑에서 '咸通六年'명 사리석함과 사리구가 수습됨으로써 탑의정확한 조성연대를 알게 되어 한국전탑연구에 하나의 큰 자료를 추가하게 되었다. 함통(咸通)6년은 신라 경문왕 5년인 865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작압전은 신라말기의 작품임을 알 수 잇다.

 

▲석조여래좌상과 사천왕석주

 

▲석조여래좌상

 

  이와 더불어 수습된 사리구의 내용을 분석하면 홍치(弘治)7년(1494),과 숭덕(崇德) 7년(1642) 등 조선시대만 해도 최소한 2차례에 걸친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불과 148년만에 다시 수리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전탑의 경우 150~200년 마다 수리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동에 전탑이 남아잇있 이유도 바로 잦은 수리를 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또 삼국유사에는 이후 보양법사에 의해 탑이 수리되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이 절의 시조 되는 중(祖師智識, 寶壤法師를 가리킴)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수하여 돌아오는데 서해 바다에 이르렀을 때에 용이 용궁 속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우고 금색 비단 가사(金羅袈裟) 한 벌과 겸하여 아들 이무기(璃目)를 시켜 그를 모시고 따라가게 하면서 부탁하여 발하였다.

 

▲사천왕석주(증장천, 광목천)

 

▲사천왕석주(다문천, 지국천)

  

“지금 삼국이 소란하여 불교를 신봉하는 임금이 없으매 만약 그대가 내 아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 작갑에 절을 세우고 살면 도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수면이 못 되어 반드시 불교를 호위할 현명한 임금이 나서 삼국을 평정할 것이다.”

 

말을 마치자 서로 이별하고 돌아와서 이 동리에 왔더니 갑자기 웬 늙은 중이 자칭 원광이라고 하면서 인궤(印櫃)를 안고 나와 이것을 주고는 사라졌다.

 

여기서 보양법사가 폐사를 부흥시키고 북쪽 고개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뜰에 5층으로 된 누런 탑이 있으므로 내려와서 찾아가 본즉 자취가 없었다. 다시 올라가 바라다보니 까치 떼가 와서 땅을 쪼고 있었다. 여기서 바다용이 작갑이라고 말하던 것이 생각나서 여기를 파보니 과연 옛날 벽돌이 무수히 나왔다. 이것을 모아서 높이 쌓으니 탑이 되면서 남는 벽돌이 없었으므로 여기가 전시대의 절터였음을 알게 되었으며, 절세워 역사를 마치고 여기에 살면서 절 이름을 따라서 작갑사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보양이목(寶壤璃目)조>

 

▲지국천왕

 

▲광목천왕

 

  이 기록에 의하면 본래 이곳에는 황탑, 즉 금칠을 한 탑이 있었고 이때에 와서 고쳐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운문사 작압전에는 신라말기의 제작의 석조여래좌상과 사천왕석주가 있다. 이들은 모두 전탑의 내부 도는 외부에 안치되었었던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봉안되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석조여래좌상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불상의 높이는 0.63m이고 무릎의 폭이 0.25m이며 대좌의 높이가 0.41m, 광배의 높이는 0.92m이다. 불상의 전면은 흙으로 칠하고 종이를 바른 위에 호분을 도장하였다가 근래에 호분을 벗겨내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대좌는 상, 중, 하 3석이고 하대석은 평면 6각형으로 각 우에 1개 각면에 2개씩의 18엽, 단판연화를 조각하였다. 중대석도 1석으로 된 6각형이나 거의 없어졌고 상대석은 평면 타원형으로 양옆에 당초문, 그 위에 14엽 연판을 조각하였다. 광배는 주형으로 두광에 연화문을 조각하였고 외연에는 화염문을 조각하였다. 대좌는 풍화 탈락이 매우 심하나 광배는 비교적 완전하게 나아 아름다운 조각을 볼 수 있다.

 

▲증장천왕

 

▲다문천왕  

   

  석조여래좌상의 좌우에는 사천왕석주가 각각 2기씩 모두 4개가 돌기둥처럼 배치되어 있다. 원래의 위치는 아니고, 이곳에 세워진 벽돌탑의 1층 탑신 몸돌 4면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으며, 머리 뒷쪽으로 둥근 광채를 띤 채 악귀를 발로 밟고 있다.


  이 사천왕석주는 신체가 큰 반면, 돋을새김을 뚜렷하게 하지 않아 양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체구도 약해보이고 얼굴 생김새도 부드러운 것으로 보아 시대가 내려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880년에 만들어진 보조선사탑(普照禪師塔) 사천왕상이나 철감선사탑(澈鑑禪師塔) 사천왕상과 비슷하지만, 보다 크고 띠주름도 굵어지는 등 형식화된 면이 있어서 8세기 석굴암의 사천왕상과 비교하여 시대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 또는 후삼국시대인 900년경을 전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작압전 심초석

 

▲심초석 사리공

 

 

 

                                                                             <2009. 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