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17. 08:36ㆍ◈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전불시대칠처가람지허 - 경주 사천왕사터 녹유신장상전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
사천왕사터는 통일신라 초기인 문무왕 19년(679년)에 창건된 쌍탑식(雙塔式) 가람으로, 2기의 목탑(木塔)이 배치되어 통일신라 사찰가람의 전형을 처음으로 이룬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수습되어 섬세한 조각과 생동감이 넘치는 표현으로 그동안 학계의 주목을 끌었던 사천왕사터 출토 녹유전(綠釉塼.녹색 유약을 바른 벽돌)은 발굴조사 결과 탑의 탑 기단부를 장식하였던 면석으로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녹유전은 모두 3가지 형식으로, 탑의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3매씩 조합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인물의 생동감 넘치는 얼굴 표정과 자세, 화려하고 정교한 갑옷 표현 등은 통일신라 초기 불교조각을 대표할만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장상(A상)
▲신장상(A상)
▲신장상(A상)
이 녹유전(綠釉塼)에 대해 최첨단 3D Scan 장비를 이용한 정밀 실측조사를 실시한 결과 녹유전은 A상과 C상 (강우방 교수의 분류에 의함)의 것으로 서목탑지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 녹유전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무렵 사천왕사지 에서 수습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관련 편들과 함께 3차원 영상촬영을 시도하여 도상으로 복원하였다. 지금까지 연구된 사천왕사지 녹유전의 모습은 모두 3종류의 도상으로 복원되는데, 대부분이 부분적인 파편형태로만 남아 있어 도상의 형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으나, 녹유전의 크기(높이 90cm, 너비 70cm, 두께 7~9cm)와 A상과 C상에 표현된 섬세한 문양까지 모두 확인 하였다.
녹유전 A상은 주상(主像)이 둥근 천정을 이룬 감실(龕室)에 무릎을 꿇은 좌우 악귀(惡鬼)를 올라타고 왼손에는 긴 칼을 들고 우측면을 비스듬히 응시하고 있는 모습으로,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사자머리 장식을 한 흉갑(胸甲)과 작은 소찰로 장식된 요갑(腰甲)을 착용하고 있는 형상이다. B상은 정면을 응시하고, 왼손에 활, 오른손에 화살을 들고 있다. C상은 그 동안 허리아래의 모습만이 부분적으로 파악된 상태이고, 얼굴 모습을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번 정밀 실측작업을 통하여 얼굴형태와 전체적인 모습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C상의 주상 얼굴모습은 둥근 감실 속에서 작은 비늘모양의 소찰(小札)로 구성된 엉성한 투구를 머리에 착용하고, 크게 부릅뜬 두 눈과 넓게 퍼진 큰 코를 가진 화난 얼굴로 좌측면을 노려보는 아주 험상궂은 인상의 상이다. 또한, 오른손을 들어 술이 길게 달린 칼을 쥐고 천의를 휘 날린 채, 두 마리의 악귀에 걸터앉아 왼손은 오른발에 걸린 왼다리의 무릎에 대고 있는 반가부좌(半跏趺坐)하고 있는 신장상의 모습이다.
▲신장상(A상)
▲신장상(A상)
▲신장상(A상)
사천왕사(四天王寺) 동ㆍ서 목탑터 기단부에서 출토된 녹유전에 새긴 상(像)의 정체에 대하여 강우방의 사천왕상설(四天王像說)과 문명대의 팔부신중설(八部神衆說)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그런데 발굴조사 결과 녹유전은 동서 목탑터 모두에서 같은 양상으로 출토됐다. 즉, 녹유전은 기단부 네 면에 목탑 기단부를 장식하던 면석(面石)으로 사용됐으며, 아울러 그것들은 기단 계단을 중심으로 각 면에 6개씩(3쌍×2조), 모두 24개(4면×6개)를 배치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아울러 일제시대에 출토된 파편과 최근에 확보한 조각들을 토대로 복원한 결과 이 녹유전들이 구현하고자 한 상은 3종류로 분류된다. 따라서 이 녹유전은 사천왕상이 될 수는 없다. 사천왕상은 네 가지로 나타나야 하지만, 세 가지에 지나지 않으며, 더구나 탑 하나를 장식한 총 숫자가 무려 24개나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팔부신중이라는 주장이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더욱 탄력을 받게 된 것도 아니다.
여기에 새로운 견해가 덧붙여졌다. 이 녹유전 상은 사천왕도 아니며, 그렇다고 팔부신중도 아닌 신왕(神王)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사천왕이라면 북방을 관장하는 사천왕은 반드시 손에 탑을 들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례가 발견되지 않으며, 나아가 활이나 화살을 든 모습을 사천왕상으로 보는 근거로 들기도 하지만, 이런 사천왕상이 등장하는 것은 9세기 이후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또 팔부신중이라고 할 때 무엇보다 그 점수가 8개가 아니라 24점에 달한다는 문제가 있다. 각종 불교경전을 보아도 팔부신중은 8명이라 했지, 그 외 숫자를 거론한 사례는 없다. 따라서 사천왕사 창건시대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한국과 중국, 그리고 불교미술품들을 비교 사례하면 이 녹유전 상은 불법 전반을 수호하는 '신왕'으로 보아야 하며, 이는 불설관정경과 같은 불교 경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신장상(B상)
▲신장상(B상)
그런데 그동안 사천왕상설을 주장해온 강우방 전 교수가 “사천왕사의 사천왕상이 3개뿐인 이유를 문무왕 비석에서 찾았다"면서 "신상들의 차림새는 분명 사천왕인데 왜 상이 3개뿐인지 이해가 안됐는데,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했다. 그는 문무왕 비문에 쓰여 있는 신라 김씨 왕가의 계보에는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5행),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6행) 등의 문구가 나온다.
君靈源自▲繼昌基於火官之后峻橫方隆由是克 枝載生英異秺候祭天之胤傳七葉以
十五代祖星漢王降質圓穹誕靈仙岳肇臨 以對玉欄始蔭祥林如觀石紐坐金輿而
<5행> …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枝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秺候 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 하였다.
<6행> … 15대조 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靈이 仙岳에서 나와, □□을 개창하여 玉欄을 대하니, 비로소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石紐를 보고 金與에 앉아 … 하는 것 같았다. …
<신라문무대왕릉비문>
▲신장상(C상)
▲신장상(C상)
▲신장상(C상)
한서(漢書)에 의하면 투후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 김일제다. 한나라와 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됐고 무제에 의해 '투후'로 임명됐다. 경주 김씨는 흉노의 후예라는 것이다. '성한왕'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로 추정된다. 사천왕사의 사천왕상은 불법(佛法)의 수호신인 동시에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의 수호신이며 문무왕이 북방에 위치한 훈 제국의 후예임을 비석에 천명했기 때문에 북방을 방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천왕상 중 북방에 맞서 국토를 수호하는 다문천상(多聞天像)은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사천왕사 녹유사천왕상은 양지스님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여러가지 제주에 통달하여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한마디로 천부적인 에술가였던 셈이다. 삼국유사에는 양지의 작품으로 영묘사 장육삼존상, 천왕상, 법림사 주불삼존 등 많은 예를 들고 있으나, 이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석장사터에서 나온 소조상과 전, 그리고 사천왕사 사천왕상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기록은 없지만 양지의작품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감은사 사리갖춤을 들 수 있다. 특히 감은사 사리갖춤의 사천왕상은 갑옷의 세부 표현이 사천왕사 사천왕상과 매우 흡사하다. 양지의 출신에 대하여 중앙아시아풍을 띠면서도 당나라 조각의 특징을 잘 반영한 그의 작품을 근거로 중앙아시아인 혹은 중앙아시아계 중국인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신라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과연 그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
<2009. 9. 5>
'◈한국문화순례◈ > 서라벌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양동마을 산책 - 경주 상춘헌고택 (0) | 2009.10.29 |
|---|---|
| 양동마을 산책 - 경주 근암고택 (0) | 2009.10.28 |
| 경주 구황동 전탑터(磚塔址) (0) | 2009.10.16 |
| 경주 구황동 출토 금강역사상 (0) | 2009.10.15 |
| 경주 남산 철와골 부처머리(佛頭) (0) | 2009.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