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서안 진시황릉(秦始皇陵, Qínshǐhuánglíng)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퉁현[臨潼縣] 여산(驪山) 남쪽 기슭에 위치한 시황제의 구릉형 묘,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이다. 《사기》 <진시황본기(本紀)>에 의하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착공되어 통일 이후에는 70여만 명이 동원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발사하는 시설도 갖추었다고 하나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진시황릉(秦始皇陵)
▲진시황릉(秦始皇陵)
능은 장방형의 두 겹의 담장으로 싸인 능원의 남쪽에 있으며, 안쪽 담과 바깥 담의 사변 길이는 각각 2,525.4m, 6,294m로, 현재는 지상의 흔적이 없는 부분이 많다. 담벽 아래에서는 도수도(陶水道), 능원 내외에서 3곳의 건축유지와 수많은 배장묘와 순장묘가 발굴되어 전체적인 규모와 구조가 확인되었다. 특히 능원 동문 밖의 거대한 병마용갱은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되었고, 능원 밖에서 발견된 100여 개의 형도묘는 건설 당시의 가혹한 강제노역의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묘지의 총체로 보면 피라미드형을 이루고 있다. 능묘는 37년간이 걸려 완공되었는데, 무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야산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내부는 개발이 되지 않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고 해도 내부는 볼 수가 없다. 진시황이 무덤을 설계할 때 훗날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수은 등을 이용한 여러 가지 함정들을 설치해 두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그 비밀을 풀 수 없어 과학이 조금더 발전하여 그 비밀을 풀 수 있을때 발굴 한다고 한다.
따라서 진시황릉 까지 간다고 해도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고, 밖에서 사진 촬영을 하거나 릉 위에 오르는 정도의 관광을 할 수 있다. 요새는 릉 주변을 아름다운 공원으로 만들어 미니 전동카나 마차로 릉 주위를 돌거나 공원 주변에 전시해 놓은 옛 유물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진시황릉(秦始皇陵)은 세계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구조가 독특하고 내용이 가장 풍부한 황제릉의 하나이다. 진시황릉의 순장 무덤의 하나인 병마용갱(兵马俑坑)은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와 나란히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리고 있다.
진시황은 (기원전 259-기원전210년)은 중국봉건사회의 첫 번째 황제로 중국역사에서 쟁론이 되고 있는 역사인물이다. 성 영(嬴). 이름 정(政)이다. 진시황은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황제로서 그는 사회경제, 문화발전을 추진시키는 조치를 취해 화폐, 문자, 도량형(길이, 용적, 무게의 단위)을 통일하고 북방 소수민족정권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 적을 방어하는 장성도 건설했다. 이러한 조치로 진시황은 중국역사의 유명한 정치가로 되었다. 한편 진시황은 아주 잔혹하고 사치한 생활을 누리면서 부화방탕했다.
▲진시황릉(秦始皇陵)
▲진시황릉(秦始皇陵)
그는 사람들의 사상을 속박하기 위해 <분서갱유(焚书坑儒)>의 야만적인 행위를 감행했고 자기의 통치에 불리한 책들을 불살라버리고 심지어는 자기와 사상과 견해가 부동한 지식인들을 생매장하는 것으로 진나라의 통치를 수호하려 했다. 또한 진시황은 재위기간 자기의 능묘 및 아방궁(阿房宫) 등 호화궁전 건설에 백성들을 내몰았고 향락을 누렸다. 진시황은 전국을 통일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자기의 능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국 70만명 노력을 동원하여 40년간 능묘를 건설했으나 죽을 때까지도 능묘를 완성하지 못했다.
기원전 221년 2000여년간 지속된 노예제 사회가 막을 내린후 중국 사상 최초의 중앙집권 봉건왕조인 진(秦)이 탄생하였다. 진의 탄생은 중국역사에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 기원전 255년부터 222년까지는 중국 역사에서 전국(戰國)시기이며 중국 노예제사회의 말기였다. 당시 많은 독립적인 소국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상호 합병의 과정을 거쳐 비교적 큰 7개 나라만이 남게 되였다. 이 나라들이 “칠웅(七雄)”이라 불렸던 진, 제(齊), 초(楚), 위(魏), 연(燕), 한(韓), 조(趙) 일곱 나라였다. 일곱 나라 중 서북쪽에 위치한 진나라가 군사개혁과 농업개혁을 비교적 일찍 실시하였기에 국력이 신속히 커졌다.
기원전 247년 13살인 영정(嬴政)이 즉위하여 진나라 왕이 되였다. 22살에 친정을 실시한 후 영정은 6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시작하였다. 영정은 널리 인재를 모았는데 실력만 있으면 그 누구든 중용을 받았다. 예하면 영정은 일찍 한의 간첩 정국흥(鄭國興)을 중용하여 “정국거(鄭國渠)”를 건설하여 진의 2만여정보의 소금밭을 가뭄이나 홍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옥토로 만들어 진의 중국 통일에 충족한 물질조건을 제공하였다.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 10년도 안되는 사이에 영정은 선후로 한, 조, 위, 연, 초, 제 6국을 멸하고 통일대업을 완성하였다. 그로써 중국은 할거를 결속 짓고 통일된 전제주의 중앙집권의 진왕조가 나타나게 되였다. 진의 왕 영정도 중국 역사의 최초의 황제가 되였다. 영정을 “시황제(始皇帝)”라 부르는것도 이런 연고에서이다.
진의 중국 통일은 중국역사에 극히 큰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큰 의의가 있다. 우선 정치면에서 진시황은 분봉제를 페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였으며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 아래에 현을 설치했으며 중앙과 지방의 관리를 모두 황제가 친히 선발하고 임명, 면제하였으며 세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진이 세운 군현제는 중국의 2000여년 봉건역사의 제도로 되였다. 오늘날 중국의 많은 현들의 이름이 바로 2000여 년 전 진 왕조 때 정한 것이다.
▲진시황릉(秦始皇陵)
▲진시황릉(秦始皇陵)
진의 중국 통일의 또 하나의 큰 기여가 바로 문자를 통일한 것이다. 진나라 이전에 각국은 모두 자기의 문자가 있었다. 이런 문자들은 근원은 같았으나 쓰는 법이 대동소이하였기에 문화의 전파와 교류에 장애가 되였다. 진은 각국을 통일한 후 진의 소전체(小篆體)한자를 전국의 통용문자로 정하였다. 그로부터 중국 한자가 규율에 따라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중국 역사의 형성과 문화의 계승에 큰 의의를 갖는다. 이밖에 진은 또 전국의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문자와 마찬가지로 통일이전에 각국의 길이, 용적, 무게 단위가 서로 달랐기에 경제 발전을 크게 저애하였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진시황은 또 화페와 법율을 통일하여 나라의 경제발전에 여건을 마련하였으며 중앙정권의 지위도 극대화 시켰다.
사상에서의 전제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명을 내려 사관이 소장한 “진사(秦史)”외의 타국의 사서나 유가경전을 소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런 책들을 함부로 소장하거나 전파하는 사람들에게도 죽음을 내렸다. 이와 동시에 북방의 소수민족들이 정권을 침범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진시황은 령을 내려 과거의 진과 조, 연 등 나라의 장성을 보수하여 연결시킴으로써 서의 사막에서 시작하여 동의 바닷가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구축하였다. 진시황은 또 70여만 명을 동원하고 거금을 들여 웅위하고 아름다운 능을 축조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남아 내려오는 진시황릉와 병마용이다. 진시황의 중국통일은 중국 역사의 장기 분열 할거 국면을 결속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대하고 한족을 주체로 다민족이 공존하는 봉건대제국을 건립하였다. 그때로부터 중국역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가 시작되었다.
▲시황제(始皇帝)
<2009.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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