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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안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

蔥叟 2009. 9. 11. 08:25

중국 서안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은 원래는 공자를 모시는 문묘였는데 송나라의 여대충(呂大忠)이 당나라의 개성석경(開城石經)이 황폐하는 것을 애석히 여겨 문묘의 뒤에 옮기고 현종(玄宗) 황제 어주효경비(御註孝經碑)와 안진경(顔眞卿) ·구양수(歐陽修) ·저수량(褚遂良) ·서호(徐浩) ·몽영(夢瑛) 등이 쓴 돌비석을 그 주위에 세워 보존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나라 시대 이후의 비석 3천여 개를 문묘 뒤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현종의 효경비를 비롯하여 안진경, 구양순, 저수량과 같은 역대의 저명한 서예가들이 쓴 석비를 모아 비의 숲을 이루게 했다. 그 이름도 '비석들이 수풀을 이루는 것 같다'하여 비림이라 붙였다. 

 

 

 

 

 

▲목패방

 

▲삼문

 

▲비림

 

   명(明)나라의 성화(成化), 청(淸)나라의 강희(康熙) ·건륭(乾隆) ·가경(嘉慶) 연간에 수리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그 동안 당송 이후 근대에 이르는 비석을 증치하였고, 또한 순화각법첩(淳化閣法帖)을 비롯한 유명한 서가(書家) 법첩의 석각(石刻)을 많이 수집하여 지금은 500여에 이르는데 보관 건물이 여섯 채나 된다. 시안 부근은 예로부터 비석이 많았지만 당나라 말 황소의 난 때 파괴, 소실되었다. 다행히 비림만은 보존되어 당 이후의 서법 변천과 석비의 양식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입구에는 목패방이 있고 여기서 삼문사이에는 반원형의 연못 분수가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평생을 걸쳐 얻는 지식은 완전한 원형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한 의미를 담아 반원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비석의 글씨체를 탐구하고 공부하려고 많은 유생들이 비림을 찾았을 때 이 다리에서 공자의 말을 되새기며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고 한다.

 

 

▲비림

 

▲비림

 

▲비림

 

   비림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삼문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문은 과거 급제자만 출입할 수 있었고, 양쪽의 두 문으로 유생들이 출입했다. 삼문을 드러서면 아름다운 정원과 6개의 비각이 양쪽에 3개씩 있었는데, 비각의 문은 모두 잠겨 있다. 이곳의 비석은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 시대의 것인데 내용이 대부분 한족을 비방하는 것이라 현대의 중국인들이 공개를 꺼리는 것이라 한다. 


   제1전시실의 작품은 과거시험 대비 필독서 13경을 새겨놓은 석판들이라 했다. 종이들이 좋지 않은 시절이라 필사본이 오래가지 못하기에 아예 표구할 것을 대비해 좋은 글씨를 돌에 써놓은 것들이다. 당나라 문종(873) 때 범본(範本)을 114개 돌판에 새겨 전시했던 것도 보이고, 13경은 처음에 ‘주역, 상서, 시경, 주례, 의례, 예기,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논어, 효경, 이아’ 등 12경이었는데 청대 때 ‘맹자’를 추가해 13경이 되었다.

 

 

▲비림

 

▲비림

 

▲비림 비각

 

   제2전시실은 서예가를 위한 범본(範本) 전시장이다. 중국의 서성(書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왕희지’를 비롯해 구양순, 안진경, 저수량 등 이름 있는 서예가들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비석, 묘지석들을 모았다. 당태종과 무측천이 제일 좋아했다던 왕희지체는 ‘대당삼장지효서비’와 당 고종의 명을 받아 회인스님이 왕희지체를 집자해 만든 ‘대당삼장성교서비’가 있고 구양순의 대표작 ‘구성궁예천문’과 ‘황보탄비’가 전시돼있다.


   제3전시실은 한나라로부터 북송, 위진, 남북조시대까지의 비석과 묘지명을 모아놓은 곳이어서 중국 서예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전시한 곳이다. 이곳에는 장욱(張旭)의 글씨 ‘순화각첩선(淳化閣帖選)’과 ‘두통첩(月+土痛帖)’, ‘단천자문(斷千字文)’ 등이 주목된다. 그는 당나라 서예가로 장쑤성(江蘇省, 강소성) 오군(吳郡) 출신이다.


   따라서,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고이자 고대 문헌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이 집대성되어 있는 곳으로, 대외 문화 교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종이가 없거나 질이 나쁜 종이 밖에 없던 시절, 오래 남을 돌에 글을 새기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고 거기에는 새기는 글은 좋은 글씨는 필요로 했기에 중요한 비(碑)에는 특별히 당대 최고의 명필을 찾았던 것이다.

 

▲비림 비각

 

 

 

<2009.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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