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함양 한경제 양릉(汉景帝阳陵, Yánglíng)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안 즉 장안을 가면 진시황릉과 병마용, 그리고 화산이나 비림 같은 것을 위주로 관광을 한다. 하지만 또 하나의 볼거리는 한 경제의 양릉이다. 양릉은 전한의 6대황제인 경제의 능이다. 사실 업적 면에서는 한 고조나 무제 등에 가려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런 덕에 처녀분으로 황릉이 발견되었다고 하였지만 워낙 규모가 있다 보니 실제로 도굴이 된 흔적도 많이 있어서 비교적 값이 나가는 유물은 없어진 것이 많고 양릉 박물관을 돌아보면 도굴 구멍이 보이므로 실제로는 많은 도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황금류나 옥기 등 귀중품을 제외하면 특색이 있는 유물들이 그대로 발굴 되었기에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고대 황릉의 발견이므로 많은 역사적 유물적 가치를 가진다.
한경제(漢景帝, 기원전 188~기원전 141)의 이름은 유계(劉啓)이고 전한의 황제(재위, 기원전 157~기원전 141)이다. 문제(文帝)의 아들로 어머니는 두황후(竇皇后)이다. 전한 문제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기원전 179년 아버지가 황제에 오르자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유학을 배웠으나 두황후는 도교 역시 유계에게 가르쳤다. 황태자 시절 먼 친척인 오나라 세자와 바둑을 두다 자신이 지게 되었는데 한 수를 물려달라 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거절하고 이에 화가 난 황태자 유계는 우발적인 실수로 바둑판을 던져 오나라 세자를 죽게한 일이 있다.
기원전 156년 선정을 펼친 문제가 사망하자 황제에 즉위, 어머니 두황후는 황태후로, 그때까지 살아있던 전한 고조의 측실이자 문제의 어머니인 박태후는 태황태후가 되었다. 그러나 경제에게는 박황후가 난 적자가 없었다. 이에 두태후는 경제에게 경제의 아우인 양왕 유무에게 다음 황제로 만들 것을 부탁하였으나, 경제는 이를 거절하였다. 기원전 151, 조모인 박태황태후가 죽자, 경제는 황후인 박황후를 황실을 번성치 못한 죄로 폐하고, 다음 황후로 가장 총애받던 후궁인 율씨(栗氏)가 유력하였으나 경제는 오히려 다른 후궁인 왕씨를 황후로 점찍고, 그녀의 소생인 유철을 황태자로 삼았다.
당시 황제의 일족은 각지에 영토를 가지고 왕국을 형성하여, 반독립국가 행세를 하였다. 경제가 즉위하여 어사대부 조착(晁錯)의 건의에 따라 제후왕(諸侯王)들의 봉지(封地)를 삭감했다. 이에 기원전 154년 오(吳)와 초(楚) 등 7국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吳楚七國의 亂'이다. 태위(太尉) 주아부(周亞夫)의 힘으로 이를 진압하였다. 이후 경제는 고조(高祖) 이래의 군국제(郡國制)의 성격을 개정하고, 무제(武帝) 이후의 중앙집권적 군현제도 확립의 기초를 닦았다. 관리를 파견해 제후국의 행정을 통솔하면서 중앙집권제를 공고히 했다. 제왕(諸王)의 실권이 크게 약화되면서 중앙집권제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문제의 백성 안정 정책을 계승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고, 전부(田賦)에 부과하는 세금도 정리했다. 관기(官紀)의 숙정(肅正)에 노력하고, 화폐를 사사롭게 주조하는 일을 금해 민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아버지 문제에 이어 선정을 펼치고 세금을 줄여 명군이라는 칭송을 들었고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와 경제의 치세를 '문경의 치'(文景之治)라 불렀다. 16년 동안 재위했다. 기원전 141년 미양궁에서 49세로 병사하여 함양의 양릉에 장사지냈다.
한양릉 외장갱의 보호 전시관은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현대화한 지하역사 박물관이다. 유물들을 가가이서 관찰할 수 있어 한나라 황제의 궁중생활의 신비로움을 살펴볼 수 있다. 특이하게도 이곳의 병마용은 크기가 진시황병마용의 절반정도 밖에 안 된다. 또한 전부 나체로 보존돼 있는데 이는 실크 옷을 입혀서 매장했지만 부식되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사들이 전부 팔이 없는 것도 운반하기 쉽게 나무팔을 붙였는데 삭아서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체 병마용은 남녀 성기가 적나라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성기가 잘린 내시도 보인다. 수많은 병사들의 모습은 불가사의하게도 똑같은 얼굴이나 똑같은 표정이 없이 각기 다르게 제작돼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희귀 역사유물들이 산재해 있는 한양릉박물관은 현재 개발 중에 있으며 81개의 매장갱 중 지금까지 10개가 발굴됐다.
▲양릉(阳陵)
▲양릉(阳陵)
▲양릉(阳陵)
▲양릉(阳陵)
▲양릉(阳陵)
▲양릉(阳陵)
▲양릉(阳陵)
▲양릉(阳陵) 모형
▲양릉(阳陵) 순장갱
▲양릉(阳陵) 순장갱
▲양릉(阳陵) 순장갱
▲양릉(阳陵) 순장갱
▲양릉(阳陵) 순장갱
▲양릉(阳陵) 순장갱
▲양릉(阳陵) 순장갱
▲양릉(阳陵) 순장갱
▲양릉(阳陵) 순장갱
▲양릉(阳陵) 순장갱
▲양릉(阳陵) 순장갱
▲양릉(阳陵) 순장갱
▲양릉(阳陵) 순장갱
▲양릉(阳陵) 마차 모형
▲양릉(阳陵) 마차 모형
▲양릉(阳陵) 토용 모형
▲양릉(阳陵) 토용 모형
▲양릉(阳陵) 8호 종장갱(从葬坑, 순장갱)
<2009.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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