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함양 한고조 장릉(汉高祖长陵, Chánglíng)
한 고조 유방(劉邦)은 자가 계(季: BC 256 ~ BC 195, 또는 BC 247 ~ BC 195)이고, 한(漢)나라를 세운 황제이다. 한왕(漢王)으로 4년 재위하였고, 황제로 8년 재위하였다. 영포(英布)의 반란을 평정하던 중 가슴에 화살을 맞은 후 상처가 재발하여 53세에 죽었다. 장지는 장릉(长陵: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동쪽)에 있다.
▲장릉(长陵)
▲장릉(长陵)
유방은 패현(沛縣: 지금의 강소성 패현) 출신으로 원래는 진(秦)왕조의 정장(亭長: 10리 정도의 땅을 관리하는 낮은 벼슬)이었다. 한번은 그가 인부들을 호송하여 여산(驪山)으로 가던 도중에 인부들이 많이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 유방은 아예 인부들을 모두 풀어주고, 자신도 따라온 인부 10여명과 함께 망탕산(芒砀山)으로 도주한 후 100여명을 더 모아 패현 관아의 문서 담당자 소하(蕭何), 감옥관 조참(曺參)과 몰래 연락을 취하였다.
진승(陳勝)이 봉기를 일으킨 이후, 소하는 현관(縣官)을 죽이고 유방을 패현의 수령으로 추대하여 패공(沛公)이라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은 항우(項羽)의 숙부 항량(項梁)에게 의탁하였다. 항량이 죽은 후 그와 항우가 함께 이끈 의병은 모두 반진(反秦)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기원전 206년 군대를 이끌고 함양(咸陽)으로 진격하여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함양에 진입한 이후 그는 호화로운 아방궁(阿房宮)을 부러워하며 궁중에 계속 머물고자 하였다. 그러나 장량(張良)의 적극적인 권유로 성밖으로 물러나 파상(灞上)에 주둔하였다.
그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폐지하고 '약법삼장(約法三章)'을 시행하여 민심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약법삼장'이란 말 그대로 복잡한 법을 간단히 세 항목으로 줄인 것이다. 첫째, 사람을 죽인 자는 목숨으로 보상한다. 둘째, 남에게 상해를 가한 자는 법에 따라 처벌한다. 셋째,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죄로 다스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항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뒤따라와 홍문(鴻門: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臨潼縣> 동쪽)에 주둔하였다. 항우는 책사 범증(范增)의 건의에 따라 그의 유일한 적수 유방을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항우의 숙부 항백(項伯)은 즉시 유방의 진영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그의 오랜 친구 장량에게 알렸다. 장량과 유방은 함께 상의를 거친 결과 10만의 병마로 항우와 40리 거리를 두고 싸우는 것은 크게 불리하니, 항우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하였다.
▲장릉(长陵)
▲장릉(长陵)
이틑날 유방은 장량, 번쾌(樊哙)와 100여명의 부하를 데리고 홍문으로 가서 항우를 알현했다. 항우는 연회를 베풀어 그들을 환대했다. 연회석상에서 유방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낮은 소리로 항우에게 사죄하면서 그와 천하를 다툴 야심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 이 말을 들은 항우는 일시적으로 유방을 죽여야 겠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범증이 다시 항우에게 여러번 눈짓을 하여 유방을 죽이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항우는 그것을 알고도 못본척 했다. 이에 다급해진 범증은 항장(項莊)을 급히 연회석상에 투입하여 주흥(酒興)을 돋구기 위해 검무(劍舞)를 추는척 하면서 기회를 틈타 유방을 찔러 죽이게 했다. 항백은 항장이 춤을 추면서 서서히 유방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고 급히 몸을 일으켜 함께 검무를 추면서 유방을 보호하였다. 장량은 살짝 밖으로 나가 번쾌를 불러 유방을 보호하게 하였다. 위협을 느낀 유방은 화장실에 간다고 핑계를 대고는 번쾌를 데리고 몰래 항우의 진영을 벗어나 오솔길을 통해 급히 자기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장량은 유방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항우에게 예물을 바치면서, "패공께서는 이미 술에 많이 취하여 먼저 돌아가셨습니다."라고 고하였다. 이 말을 듣고 범증은 탄식을 그치지 않았지만 어찌할 방법도 없었다. 이렇게 하여 항우와 유방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홍문연(鴻門宴: 홍문에서의 연회)' 고사이다.
같은 해 12월에 유방은 항우로부터 한왕(漢王)에 책봉되어 파촉(巴蜀), 한중(漢中)의 땅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그는 관중(關中)으로 출병하여 항우와 4년에 걸친 전쟁을 벌였으니, 그것을 '초한전(楚漢戰)'이라 한다. 유방 자신은 뛰어난 장수의 재능도 없었고, 어떤 고명한 책략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는 인재를 널리 구하여 그 재능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잘 썼다. 장량, 소하 등의 치밀한 계책과 한신(韓信), 팽월(彭越), 영포(英布) 등 뛰어난 장수들의 출전으로, 기원전 202년에 마침내 숙적 항우를 물리치고 초한전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 해 2월에 사수(汜水: 지금의 하남성 형양현<荥陽縣> 경내)에서 황제라 칭한 후 도읍을 장안(長安: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西安市>)에 정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였다. 역사에서는 이를 전한(前漢) 또는 서한(西漢)이라 일컫는다.
▲장릉(长陵) 정상부, 멀리 태후릉이 보인다
▲장릉(长陵) 능비
유방은 재위 시기에 한신, 팽월, 영포 등의 타성(他姓: 유씨가 아닌 다른 성씨) 왕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유씨 성의 왕들을 많이 임명하였다. 진나라의 법률을 수정하여 <한율(漢律)>을 제정하고, 역법과 군법, 도량형을 정비하였다. 오랜 전쟁으로 빈곤해진 사회를 구제하기 위해 그는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생활을 안정시키는 정책을 취하여, 중농억상(重農抑商: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함), 부역과 조세 경감, 노비 해방, 병사들의 제대 등의 조치를 시행함으로써, 사회는 점진적으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기원전 196년에 유방은 영포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쟁 중에 가슴에 화살을 맞았다. 그 이듬해 3월에 상처가 재발하여 병세가 위중해지자, 그는 제후들과 신하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다음 백마(白馬)를 죽여 함께 그 피를 마시며 다음과 같이 맹세하게 했다.
"지금부터 유(劉)씨가 아닌 사람은 왕에 책봉될 수 없고, 공을 세우지 않은사람은 제후가 될 수 없다. 누구든 이 맹약을 어기면 천하의 사람들이 함께 그를 토벌할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진평(陳平)에게 명령하여 즉시 연(燕)에서 형양(荥陽)으로 돌아가 관영(灌婴)을 도와 지키게 하고 제후들의 반란을 예방토록 하였다. 그런 다음에 여후(呂后)를 불러 뒷일을 부탁했다. 여후가 그에게 물었다.
"만약 재상 소하가 죽으면 누가 그 뒤를 이을 적임자이겠습니까?"
"조참이오."
"조참이 죽은 뒤에는요?"
"왕릉(王陵)은 진평이 보좌하고 있소. 진평은 지략이 뛰어나긴 하지만 혼자서 어떤 일을 감당해내지는 못합니다. 주발(周勃)은 성실하고 지식은 부족하지만 앞으로 유씨천하를 안정시키는데 그가 없으면 안되니, 그를 태위(太尉)에 임명하면 좋습니다."
여후가 다시 뒷일을 묻자 유방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뒷일은 당신이 알 필요가 없을 것 같소."라고 하였다. 그 해 4월 갑신일(甲辰日)에 유방은 장안 장락궁(長樂宮)에서 병사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라 하고 고황제(高皇帝)라 일컬었으며, 역사에서는 습관적으로 그를 한고조(漢高祖)라 칭한다.
▲장릉(长陵) 능비
▲여태후릉(呂太后陵)
한고조 유방의 아내인 여태후(呂太后, 기원전241~180)는 산동단현 출신이다. 어렸을때 부친은 원수를 피하여 패현으로 피난와서 살았다. 첫 번째 만난 연회때 유방의 비범한 기도에 반하여 기쁘게 반려로 맺어졌다. 일테면 평범한 인간이었던 유방의 부인인 셈이다.
기원전 205년 유방은 항우를 이기기위하여 여치와 유방의 부모는 이년간이나 인질로 있었다. 203년 여치는 한나라로 귀환하여 관중에 머물렀다. 유방이 천하는 통일한후 칭제후에 여치는 황후로 봉하여졌다. 둘 사이에는 그녀가 낳은 영(盈)이라는 아들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여치는 위인됨이 모략을 일삼았다. 한초, 여후는 유방을 도와 한신(韓信)을 죽이기도 하였다. 중국 역사상 최고 잔혹녀로 꼽히는 여태후는 모성이 매우 강한 사람 이었다. 한고조 유방의 아내인 여태후는 태자가 보위에 올랐을 때 팽월 등 이성왕(異姓王)들이 도전해올 것으로 예상하고 한신, 팽월 등을 미리 제거했다.
유방이 죽은 후에 정권을 장악하여 16년간 한제국을 통치했다. 혜제(惠帝)를 세워 자신은 황태후가 되었다. 혜제는 유약하였기에 실제 정치는 그녀의 장악하에 놓였다. 188년 혜제 붕어 후에 소제(少帝)를 세웠는데 소제는 생모를 위하여 여후가 죽기를 바라였기에 원한어린 말을 남기었는데 이에 발끈하여 소제제위 8년에 여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상산와 유의를 옹립 황제를 시켰다. 호령일출태후란 말은, 여후가 국정을 마음대로 장악한 16년간을 가르키는 말이다.
여태후의 평가는 후세에 분분하지만 유방을 도와 휴양생식의 황노정치를 병행시키며 나름으론 애를 썼다. 유방 임종 전의 여후는 유방이 죽기 전에 미리 안배를 하였다. 소하 상국 후에 누가 그 자리를 이을 것인지 그러자 조참, 왕릉, 진평순으로 잇게하였다. 단 독임을 막게하였다. 문화는 그다지 높지 않았으며 유가천하는 위기가 찾아 왔다.
유씨천하를 위하여 주발이 필요하였기에 태위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실제 권력은 여후가 장악하였다. 단지 그녀는 유방이 임종 전에 중요인상의 안배적 차원에서 신하들을 다루어 나갔다. 상국의 자리는 그렇게 소하, 조참, 왕릉, 진평, 주발의 개국공신 순으로 이어져 내려갔다. 각기 대신들을 쥐락펴락하는 바람에 나라는 안정되었고 백성들은 편안하였다.
모든 공신들은 내치에 힘썼으며 백성의 마음을 따르기 위해 애썼고 법제, 경제와 사상문화의 각개 영역에 군등하게 힘을 써서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이루는 확고한 기초를 쌓았다.
남편인 유방이 죽자, 유방이 생전에 총애했던 척부인의 옷을 벗기고 힘이 센 내시들로 하여금 두 다리를 잡아당기게 한 다음, 남편과 관계를 가졌던 음부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리고는 죄수들에게 척부인을 욕보이게 던져놓았으며, 강제로 독약을 먹이고 귀에는 유황을 붓고 두 눈까지 뽑아버렸다. 결국에는 양팔과 다리까지 잘랐으며, 시체는 똥오줌이 넘치는 변소에 던져버렸다. 태자의 이복형제 및 숙모도 처치한 뒤 아들을 여씨 집안 후손과 결혼시킴으로써 황실 혈통을 유씨에서 여씨로 바꾸려 하였다. 그러나 여태후가 죽은 뒤 여씨 일족의 권력은 유씨 집안으로 넘어갔다.
▲여태후릉(呂太后陵)
▲여태후릉(呂太后陵)
진나라 진시황 말엽, 패현(沛縣) 현령의 집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이름하여 여공(呂公). 여공은 본시 단부(單父, 지금의 산동성 단현) 사람인데, 원수들의 핍박을 피하여 집을 패현으로 옮기고 친구들에게 의지하여 살고있었다. 고을 내의 유지들과 관리들은 현령의 집에 귀한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지가지 예물을 준비하여 인사하러 왔다.
공조(功曹) 소하(蕭何)는 당상(堂上)에서 예물을 접수하고 있었는데, 소하는 방문객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한 가지 규정을 만들었다. 즉, 축하 예물이 천냥에 미치지 못하는 방문객들은 당에 오르지 말고 당 아래에 앉아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때, 유계(劉季)라는 이름을 가진 한 정장(亭長)으로부터 하례금으로 일만전(一萬錢)을 올리겠다는 전갈이 왔다. 소식을 전해들은 여공은 서둘러 유계를 불러 들였다. 여공은 평소 사람들의 관상을 보는데 일가견이 있었는데, 그는 유계를 보자마자 크게 놀랐다.우뚝 솟은 코와 긴 목이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여공은 기뻐하며 유계를 당상으로 올라오게 하였다.
유계는 비록 정장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큰 뜻을 품고 있었으므로 작은 관리들 따위는 눈에 없었다. 유계가 이렇게 온 것은 사실 여공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모욕을 주고자 함이었으며, 그는 일만전은 커녕 한푼의 돈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유계 자신도, 여공이 영웅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자신을 당상으로 청하여 향연을 베푸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떠나기 전에, 여공은 유계에게 말했다."저는 평소에 사람들의 관상을 봐주는 일을 즐겨하며, 이미 많은 사람들을 보아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껏 귀관만큼 좋은 관상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공께서 평생 배필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유계는 말단 정장 신분으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또 아내까지 얻게 되었으니 실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유계는 그저 술에 취한 여공이 헛소리를 하는 것이 아닐까 염려되어, 그의 말에 따르겠다는 대답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였다.
여공의 아내 여온은 남편이 사람 보는 눈도 없이 시골 정장에게 딸을 주겠다고 약조하였다는 말을 듣고 노발대발하여 여공을 질책하였다."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 같으니라구. 날이면 날마다 딸에게 귀인(貴人)을 찾아서 짝을 지어주겠다고 떠들어대더니, 현령의 청혼은 거절하고 이제 와서 유계인가 하는 놈에게 딸을 주겠다는 거요."여공의 아내는 쉬지 않고 불평을 쏟아냈지만, 여공은 별 대꾸를 하지 않고 그저 이렇게 말했다. "이 일에 담긴 도리를 당신과 같은 아낙네가 어찌 알겠소?"
▲여태후릉(呂太后陵)
▲여태후릉(呂太后陵)
이렇게 하여, 여공의 딸은 결국 유계의 아내가 되었다. 촌구석의 정장에게는 변변한 재산이 없었으니, 생활 역시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여공의 딸 여치(呂雉)는 유계에게 시집을 온 후, 시골 아낙이 되어 아이를 낳고 집안 일을 하며 밭에 나가 농사일을 하였다.어느 날, 여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노인이 다가오더니 여치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다. 여치는 공손하게 물 한 사발을 올렸다. 그 노인은 물을 마시면서 여치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인은 천하의 귀인(貴人)이시구료."여치는 기인(奇人)을 만난 것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다. 여치는 두 아이들을 불러 노인 앞에 서게 하였다. 노인은 먼저 남자아이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그렇소. 부인이 귀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아이 때문이오."이어서 노인은 딸을 보더니 같은 칭찬을 하였다."이 아이 역시 대귀(大貴)의 상을 하고 있구료."
노인은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천천히 그 자리를 떠났다.이때 유계가 밭으로 나왔다. 여치는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을 그에게 이야기하였다. 유계는 그 노인이 멀리 가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급히 그를 뒤따라갔다. 과연 유계는 노인을 만날 수 었었다. 노인은 유계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방금 부인과 이이들의 귀상(貴相)을 보았는데, 그대와 비슷하였소. 하지만 그대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귀한 상이군요."
유계, 그는 훗날 한나라 고조(高祖) 유방이라 불리게 되었고, 여치는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여후(呂后)가 되었다. 두 아이들 가운데 아들은 한나라 혜제(惠帝)가 되었고, 딸은 노원공주(魯元公主)가 되었다. 유방이 초패왕과 천하를 다투던 시절, 그의 부인 여씨는 2년반 동안 잡혀 있었지만, 이때 유방은 젊고 아름다운 척희(戚姬)를 만나 또 다시 새로운 즐거움을 맛보았으니.......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에서 그녀의 치적을 다음과 같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혜제와 여태후 시절에는 백성들은 전국시기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군신(君臣)들은 모두 '무위(無爲)'의 경지에서 안식(安息)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혜제는 팔장만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여태후가 여성으로서 황제의 직권을 대행하여 모든 정치가 방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천하가 태평하고 안락했다. 형벌을 가하는 일도 드물었으며 죄인도 드물었다. 백성들이 농사에 힘을 쓰니 의식(衣食)은 나날이 풍족해졌다."
▲여태후릉(呂太后陵)
<2009. 8. 1>
'◈실크로드문화순례◈ > 서안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함양 한양릉 거륜유적(车轮遗迹) (0) | 2009.08.15 |
---|---|
중국 함양 한양릉 도조(陶灶) (0) | 2009.08.14 |
중국 함양 한양릉 와당(瓦当) (0) | 2009.08.14 |
중국 함양 한양릉 토용(土俑) (0) | 2009.08.14 |
중국 함양 한경제 양릉(汉景帝阳陵, Yánglíng) (0) | 2009.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