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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사천왕사터 '사천왕사' 銘 기와

蔥叟 2009. 7. 17. 08:36

경주 사천왕사터 '사천왕사'銘 기와

<국립경주박물관>

  

   사천왕사(四川王寺)는 삼국통일전쟁 과정에서 당나라의 침략을 불법(佛法)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창건된 절이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는 당나라에 대하여 자주노선을 걷는다. 그러나 당나라는 계속 신라를 속국화하기 위하여 노력함으로서 나당 양국은 긴장관계를 유지하게 되고 급기야 673년 당은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정복하려는 전면전을 준비하게 된다. 이때 신라에서 사천왕사를 창건하여 당군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삼국유사 문호왕 법민조에 상세히 전해지고 있다.

 

▲'사천왕사'銘 기와

 

   당나라 유격병의 모든 장병들이 진에 머물면서 장차 신라를 습격하려고 계획하는 것을 왕(문무왕)이 알아채고 군사를 동원하였더니 이듬해에 당고종이 인문(金仁문, 문무왕의 동생으로 당시 당나라에 있었다)을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우리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고도 우리 군사를 해치려는 것은 어떤 까닭이냐?” 하고는 곧 옥(원)에 가두고 50만 군사를 조련하여 설방(薛邦)을 대장으로 삼아 신라를 치려하였다. 이때에 의상법사(義相法師)가 불법 공부를 위하여 당나라에 들어가 있던 중 인문을 찾아와보니 인문이 이 일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의상이 곧 귀국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더니 왕이 매우 염려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방어할 계책을 물었다.


   각간 김천존(金天尊)이 말하기를, “요즘 명랑법사(明朗法師)라는 이가 있어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받아왔다고 하오니 한번 물어보소서” 하였다. 명랑이 왕에게 아뢰되, “낭산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는바 그곳에 사천왕사를 짓고 도량(道場)을 개설하면 될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급보하기를, “당나라 군사들이 수없이 우리 나라 지경까지 와서 바다 위에 순회하고 있사외다”라고 하였다.

 

▲'사천왕사'銘 기와

 

   왕이 명랑을 불러 말하기를, “일이 벌써 절박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명랑이 말하기를, “채색 비단으로써 절을 임시로 만들면 됩니다”하여 왕이 채색 비단으로써 절집을 꾸리고 풀(草)로써 오방(五方․동,서,남,북,중앙)이 신상을 꾸려놓고 유가 명승(瑜伽明僧) 열두 명이 명랑법사를 우두머리로 삼아 문두루(文豆婁)의 비밀 술법을 썼다. 이때에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가 아직 교전을 하지 않았는데 풍랑이 크게 일어나서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침몰하였다. 뒤에 절을 고쳐지어 사천왕사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불단의 법석이 계속되고 있다.

<삼국유사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조>


   결국 사천왕사는 나당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전쟁사령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지은 절이었다. 물론 서해에 당군이 수몰 당하였다는 것은 일부 당군이 죽은 것을 미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천왕사'銘 기와

 

   이렇게 창건된 사천왕사는 이후에도 호국사찰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고려시대에도 왜구가 동해안으로 침입할 때에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비법으로 물리쳤다고 한다. 또 신라가 멸망할 때에도 이변(異變)이 일어났다. “제54대 경명왕 시대인 정명(貞明) 5년 무인(918)에 사천왕사 벽에 그린 개가 짖으므로 사흘 동안 불경을 설법하여 푸닥거리를 하였더니 반나절 만에 또 짖었다. 또 10월에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에 그린 개가 뛰어나와 마당 복판으로 달리다가 다시 벽 속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어쨌든 사천왕사는 조선 초기까지는 절의 명맥이 유지되었으나 그후 조선의 폐불정책(廢佛政策)에 따라 폐사된 것 같다.

 

 

 

<2009.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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