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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사천왕사터 문무왕릉비편

蔥叟 2009. 7. 16. 08:42

경주 사천왕사터 문무왕릉비편

<국립경주박물관>

  

   사천왕사터에 남아있는 동서 양 귀부 가운데 서쪽 귀부에는 문무왕릉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후기 금석문에 관심이 많았던 경주 부윤 이계 홍량호는 정조 20년(1796) 무렵 낭산 선덕여왕릉 아래에서 문무왕릉비편을 처음 발견하였다고 했다. 비석의 건립연대는 681년과 682년 이후라는 두가지 설이 있다. 

 

▲문무왕릉비편

 

   추사 김정희는 1817년 또는 1824년에 두개의 비편을 발견하고 '해동비고(海東碑攷)'에 문무왕릉비편을 선덕여왕릉 아래 신문왕릉 사이에서 발견 했다고 기록해 두었다. 추사는 이 비편을 탁본하여 청나라에 보냈고 그 탁본이 청나라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전하고 있다. 추사는 또한 비편을 비좌에 꽂아보니 크기가 일치했다고 했다. 하지만 동서귀부 어느쪽에 꽂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1960년에 경주박물관에 근무하던 이종성(李鐘聲)이 경주시 동부동의 경주문화원 인근 민가 정원에서 이 비편을  재발견하여 집주인에게는 3만 5천원의 보상금을 지급한 후 1961년 9월 11일자로 경주박물관에 수장하게 되었다. 능비는 왕릉 앞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문무왕릉비는 왜 사천왕사에 세워졌을까? 현재까지는 사천왕사가 문무왕이 창건한 절이기 때문이라는 추정만 할 뿐 두고두고의 과제로 남을 것이다. 

 

▲비문

 

    이 비편은 비의 앞뒷면 아랫 부분에 해당된다. 비문은 마멸된 부분이 많아 판독이 어려우나, 대략 앞면은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 김씨의 내력, 태종 무열왕의 치적, 문무왕의 사적 및 백제 평정에 관한 내용이며, 뒷면은 문무왕의 유언과 장례에 관한 내용이다. 비문은 국학(國學) 소경(少卿)인 '金ㅁㅁ'가 지었으며, 글씨는 대사(大舍)인 '한눌유(韓訥儒)'가 썼다. 글씨는 구획선 내에 2cm 안팎의 구양순체(歐陽詢體) 해서(楷書)로 단아하고 활기찬 느낌을 준다. 이 비편은 지금가지 발견된 신라의 능비 가운데 가장 연대가 이른 것이며, 비문을 짓고(撰者) 쓴 사람(書者) 이름이 처음으로 기록된 중요한 금석문이다.

 

 

 

<2009.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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