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보원사터 법인국사보승탑ㆍ탑비
법인국사보승탑은 탑비와 함께 금당터 뒤에 나란히 서 있는 팔각원당형의 부도이다. 기단부가 땅속에 뭍혔던 것을 1962년도에 조사하여 기단부의 구조가 밝혀졌다. 이 부도는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위에 8각형의 기단부와 탑신부를 형성하고 그위에 상륜부를 세운 형식의 부도이다. 기단부는 상중하대로 구성하였으며 하대석에는 안상을 음각하고 그 안에 사자상을 양각하였다. 그 위 중대석 괴임돌에는 눈 코 입 비늘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용을 구름과 연꽃 사이에 조각하였다. 중대석은 높게 조성되었는데 8면에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상대석은 제일 밑에 앙연을 도드라지게 조각하고 그 위에는 탑신 받침을 높게 하여 각면에 난간모양을 세겼다. 옥신석은 각면에 우주가 모각되고 각면에 사천왕상, 문비, 보살상이 조각되었다. 옥개석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이 있고 모각된 서까래는 실감나게 표현했고, 추녀끝을 살짝들어 올렸다. 윗면에는 지붕 골을 조각하고 물매를 급하게 만든 다음 8모서리의 추녀끝에 귀꽃을 높이 치켜 세웠다. 옥개석 위에는 복연대석을 놓아 상륜부를 받고 있으며 현재 노반 복발 보륜 보개등이 남아 있다. 3년후인 978년에 보승탑비가 세워진 것을 고려해 볼 때 법인국사 보승탑은 보승탑비 건립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8년에 해체복원하였다.
법인국사의 탑비이며 고려 경조 3년(978)에 경종의 지시로 세워졌다. 비몸 높이 230cm, 폭 115cm, 글자 수 5,000여자나 되는 거비이며 국공(國工)을 파견하여 이들이 세우게 했다. 법인국사는 신라말~고려초의 고승으로 법호는 탄문(坦文)이다. 비문의 내용은 탄문의 일대기이며, 신라 효공왕 4년(975) 에 8월14일에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속성은 고씨로 5세에 불가에 출가하여 15세에 계를 받고 광종 19년(968)에 왕사, 광종 25년(974)에 국사로 지내다가 이곳 보원사에 와서 광종 26년(975)에 입적하였다. 역대 왕들과 가까웠으며 국가 시행 불사를 도맡아 시행하였고, 특히 광종은 왕권 강화 작업 기간 이후 정신적 지주로서 왕사, 국사로 가까이 있게 했으며 입적하자 매우 슬퍼하였다. 이분은 학승으로 제자가 많아 말년에 보원사에 올 때, 선, 교승(禪, 敎僧) 천여명이 영접했으며 이곳을 고산(故山)이라 하고 여기에 와서 묻혔다. 이것으로 보아 어렸을 때 이곳에서 수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귀부의 귀갑은 납짝하게 조성하여 땅에 찰싹 엎드린 자세로 조성한 다음 귀두는 여의주를 입에 문 용머리로 조각하였고 귀갑면에 6각의 격자무늬를 조각한 후 그 중심부에 장방형의 비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비신을 올려 놓게 하였다. 오석으로 된 비신의 앞뒤에 해서로 비문을 음각하였는데 글씨의 크기는 직경 1.5cm이며 앞면의 제액은 직경 4cm에 전서로 각자하였다. 이수부는 문양화된 구름을 가운데 두고 두마리의 용이 머리를 들어 서로 마주보게한 모습으로 조각하였다. 이수의 앞면에 "가야산 보원사 고국사 제증시법인 삼중대사지비"라 각자 되었고 비신의 비문초에 광록대부태승한림학사전내봉령신 김정언이 비문을 짓고 유림낭사천대박사신 한윤이 비문과 전액을 섰다는 기록이 있고 비문끝에 김승겸이 각자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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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국사보승탑
▲문비
▲사천왕상
▲사천왕상
▲사천왕상
▲사천왕상
▲사천왕상
▲사자상
▲사자상
▲사자상
▲사자상
▲사자상
▲상대석 앙련
▲보승탑비
▲보승탑비
▲이수
▲보승탑비 비문
<2008.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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