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마애삼존불입상
태안읍 백화산 정상 부근에 있는 백제시대의 마애삼존불이다. 높이는 왼쪽 불상 207㎝, 가운데 보살상 130㎝, 오른쪽 불상 209㎝. 이 상은 커다란 바위의 표면에 가운데 보살상을 본존으로 하여 좌우에 불상을 배치한 특이한 삼존형식으로 조각되어 있다. 원래 삼존불의 주위에는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각 상은 모두 두광(頭光)과 단판 연화대좌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마멸이 심한 편이며 무릎 아랫부분이 땅속에 묻혀 있다 1995년에 발굴하여 지금은 연화대좌까지 모두 드러나 있다. 두 불입상은 손 모양만 약간 다를 뿐 거의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태안 마애삼존불입상 실측도
▲마애삼존불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그 위에 작은 육계(肉髻)가 얹혀 있다. 얼굴은 둥글고 통통한 편으로 미소를 띠고 있으며 신체 역시 어깨와 가슴을 양감 있게 표현해 전체적으로 장중한 느낌을 준다. 법의는 두꺼운 통견(通肩)으로 걸쳤는데 옷주름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길게 늘어지면서 묵직하게 처리되었으며 가슴 위로는 군의(裙衣)를 묶은 띠매듭이 보인다. 두 손은 4번째손가락과 5번째손가락을 구부린 채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으나, 왼쪽 불상은 가슴 앞으로 올린 왼손에 약합(藥盒)으로 보이는 둥근 지물(持物)을 들고 있다. 중앙에 위치한 보살상은 두 불상에 비해 크기가 작으며 머리에는 높은 보관(寶冠)을 쓰고 있고 관의 장식이 어깨 위까지 늘어져 있다. 천의(天衣)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으나 양 어깨를 덮고 내려와 무릎 밑에서 교차되었으며, 두 손은 배 앞에서 모아 보주(寶珠)를 위아래로 감싸고 있다.
이 삼존불상은 양감 있는 얼굴표현이나 비교적 당당한 체구 등에서 중국의 북제(北齊) 또는 수대(隋代) 불상의 양식이 보이며, 특히 보살상에 보이는 높은 보관의 형태와 두 손에 보주를 들고 있는 도상은 부여 신리 출토의 금동보살상을 비롯한 서산마애삼존불 등 백제의 초기 보살상에서뿐만 아니라 일본 아스카[飛鳥] 시대의 호류사[法隆寺] 금당석가삼존상의 협시보살상 및 보장전(寶藏殿)의 금동보살상, 몽전(夢殿)의 목조관음보살상 등과 비교된다. 따라서 그 제작연대는 7세기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태안반도와 인접한 지역에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불상인 서산마애삼존불상을 비롯해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 등 많은 불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중국과의 교역에서 지역적으로 중요한 요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애삼존불
▲보살입상
▲보살입상대좌
태안마애삼존불의 존명을 알아보자. 현재 태안 마애삼존불의 존명에 대해서는 몇가지 다른 견해가 제기되어있다. 먼저 황수영은 가운데 보살을 관음보살로, 좌우협시불을 약사여래와 석가여래로 보고 있다. 강우방은 가운데를 역시 관음보살로 좌우협시불을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로, 문명대는 가운데 보살을 미륵보살로 좌우협시불을 석가여래와 다보여래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를 하나하나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가운데 보살입상은 머리에 관대가 좌우로 뻗은 높은 삼면보관을 쓰고, 양손으로 보주로 보이는 지물(持物)을 쥐고 있는 봉보주보살상이며, 화려한 형태의 옷을 걸친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로 보고있다. 백제지역에는 이러한 유형의 봉보주보살상이 유행하여 규암면 신리 출토의 금동보살입상과 서산 마애삼존불의 우협시보살입상 등이 있으며, 백제에서 만들어져 인본으로 전해진 많은 관음보살들이 양손으로 보주를 들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또한 강우방은 태안 마애불이 있는 산의 이름이 백화산(白華山)이라고 하는 데 착안한다. 즉 백화산은 범어의 보타락가(補陀落迦:Potalaka)를 의역한 것으로, 작고 흰꽃이 피어있는 산으로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을 말한다. 따라서 가운데 보살입상은 관음보살이라는 것이다.
가운데 보상입상이 관음보살이라면 우협시불은 아미타여래가 된다. 그리고 좌협시불은 약합을 들고 있으므로 약사여래이다. 백제사람들은 이곳에서 당나라를 오가면서 안전한 항해를 기원했을 것이다. 관음보살은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보살이므로 안전한 항해를 바라는 백제인들에게 가장 중심되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또 머나먼 항해길에 병이 나면 약사여래에게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빌었을 것이며, 항해중 살아돌아오지 못했을 경우 극락왕생을 아미타여래에게 기원했을 것이다.
▲좌협시불과 보살입상
▲좌협시불대좌
두번째로 가운데 보살입상을 미륵보살로 보는 경우이다. 한 손이나 양손에 보주를 쥐고 잇는 봉보주보살의 경우 관음보살이 대부분이지만 중국 불상 중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상당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 좌협시불이 약합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로 보는데,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약합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가 되어서야 약사여래가 약합이나 약호를 들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약사여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라서 왼손의 지물은 보주 또는 발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좌협시불은 석가여래라고 주장한다.
또한 태안 마애불은 삼존상이지만 가운데 보살입상을 빼면 여래 2구가 좌우로 병립되어 있으므로 이불병립상(二佛竝立像)으로 볼 수 있다. 이불병립상일 경우 두 여래는 현재불인 석가여래와 과거불인 다보여래라는 것이다. 이럴 경우 가운데 보살입상은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된다. 그리고 태안마애불은 법화경에 근거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불을 모신 삼세불이 된다.
다보여래(多寶如來)는 범어로 프라부타라트나(Prabhutaratna)이며, 5여래(如來) 중의 하나. 동방의 보정세계(寶正世界) 교주(敎主)로서, 《법화경(法華經)》의 증명자(證明者) 또는 다보불(多寶佛)이라고도 한다. 다보여래(多寶如來)는 일정한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 보살로 있을 때에 "내가 성불하여 멸도한 뒤 시방세계(十方世界)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곳에는 나의 보탑(寶塔)이 솟아나와 그 설법을 증명하리라"고 서원한 부처님으로, 석존이 영산(靈山)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에도 그 탑이 솟아 나왔다고 하였다. 탑 속의 다보여래가 절반의 자리를 석가에게 양보하고, 두 부처가 나란히 앉아 허공회(虛空會) 의식을 가졌는데, 보탑 내 이불병좌상(二佛竝座像)은 이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우협시불과 보살입상
▲우협시불대좌
<2008.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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