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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해미읍성 동헌

蔥叟 2008. 8. 31. 06:50

서산 해미읍성 동헌

 

   해미읍은 조선 초기 태종 18년(1418)부터 효종 대인 1650년대 까지 약 200여면 동안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주재하던 국방의 요충지였다. 성종 22년(1491)에 성벽을 쌓고 병영의 관아 즉 관청건물을 정비하였다. 17세기에 병영이 옮겨간 뒤로 해미현은 위축되었고 1910년 이후로는 성내의 건물들도 점차 없어졌다. 1980년에 동헌과 객사 건물터를 발굴한 후 정비하였다. 객사 앞마당에 돌을 깔았고, 둘레의 담장을 맞담으로 돌렸으며,  남쪽에 대문을 내고 대문에 다시 목책을 쳐서 이중으로 요새를 방비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건물들을 복원하여 옛모습의 일부나마 알수 있도록 하였다.

 

   동헌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비롯한 현감겸영장(縣監兼營將)의 집무실로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해미 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 군, 현의 병무업무와 토포사(討捕使)를 겸한 지위였다. 책실(冊室)은 병마절도사 또는 현감겸영장의 사적인 일을 돕거나 그들 자제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던 곳으로 일명 책방(冊房) 또는 책사(冊舍)라고도 한다. 동헌부속사는 조선시대 관아건물 배치로 보아 고자실로 추정되는 건물로서 관아의 물품을 보관하고 출납을 맡아보던 하급관리를 고자(庫子)라 하였으며 고자실(庫子室)은 이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해미읍성은 아픈 상처를 지니고 있다. 1800년대 말 대원군 집권시 참혹한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당시 1000여명의 천주교인이 이 해미읍성에서 죽음을 당했는데, 나무에 철사줄로 목을 매달고 심지어는 교인들을 자리개질하듯 돌에 패대기질을 쳐 죽이기도 하고, 해미천변에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해미읍성에는 아직도 그 현장이 생생히 보존되어 있다. 진남문을 들어서면 새로 지은 관아까지 곧게 뻗은 흙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가다 관아 앞 오른쪽으로 철 구조물에 둘러싸인 호야나무 한 그루가 있다. 멀리서 보면 아주 잘 생긴 나무인데, 이 나무가 바로 참혹했던 학살의 현장이다. 나무에 철사줄을 묶어 교인들을 목매달아 죽였다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직도 철사줄에 얽힌 자국이 나무에 남아 있다.

 

▲해미읍성 회화나무

 

▲동헌 대문

 

▲동헌 전경

 

▲동헌

 

▲책실

 

▲고자실

  

▲해미읍성 성벽내부

 

▲해미읍성

 

▲해미읍성

 

▲해미읍성

 

 

 

<2008.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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