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용담사터(龍潭寺址)
용담사는 백제 성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전설에 의하면 용담천 깊은 물에 이무기가 살면서 온갖 행패를 부리자 이를 막기위해 신라말 도선국사가 절을 창건하여 용담사라 이름을 지으니, 그 뒤로는 이무기의 나쁜 행동이 없어졌다고 한다. 전설을 뒷받침하듯 절 안의 대웅전은 북쪽을 향하여 용담천 쪽을 바라보고 있다. 절터에는 거대한 석불입상이 북쪽을 바라보고 서 있으며 그 앞으로 석등과 칠층석탑이 한 줄로 서 있다.
▲용담사터 전경
▲용담사터 전경
용담사터 칠층석탑은 단층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얹었는데, 너무 길쭉하고 홀쭉한데다가 지붕돌이 몸돌보다 두터워서 불안정한 모습이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간단하게 되어 있다. 탑신의 몸돌은 2층에서부터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3층은 6단, 4층은 5단, 5층은 4단, 6∼7층은 3단으로, 위로 오를수록 받침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네 귀퉁이도 희미하게 들려 있다. 추녀 아랫면은 거의 수평이고 낙수면 경사도 완만하며 추녀 끝의 반전은 희미하다.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불안정한 모습으로,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측된다. 탑신의 5층 몸돌은 편편한 돌 2개를 양쪽으로 세워 위를 받치고 있는데, 이 불안정한 부분 때문에 탑이 기울어져 있다. 높이가 9.95m에 달해 상승감이 매우 강조되어 있으나 키가 너무 크고 날렵하며 외소하여 안정감이 없다. 마치 비정형, 비균제, 비균형의 운주사 탑을 옮겨 놓은 것 같다.
▲용담사터 칠층석탑
▲칠층석탑 탑신부
칠층석탑과 석불입상 사이에는 팔각지대석, 팔각하대석, 팔각간석, 연화문이 조각된 상대석 위에 팔각화사석을 얹고 지붕돌을 얹은 석등이 하나 서 있다. 하대석은 땅 속에 묻혀서 볼 수가 없다. 육중하면서도 별다른 장식이 없어 소박하다.
▲칠층석탑 지붕돌
▲칠층석탑 탑신부
현재 보호각 속에 안치된 석불입상은 불상(佛像)과 광배(光背)를 한돌에 새긴 일종의 높은(高) 돋을새김(浮彫)의 마애불적(磨崖佛的)인 거구(巨軀)의 석불입상으로 높이가 6m에 이른다.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위에는 높은 육계(肉?)가 솟아 있고, 얼굴은 바위의 손상으로 분명하지는 않으나 힘차고 박력있는 표정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상은 장대한 체구, 상당한 어깨, 넓은 가슴, 강건한 하체 등에도 표현되어 있어서 전체적인 모습은 괴량감(塊量感)이 넘친다. 목에는 형식적으로 새긴 3줄 주름인 삼도(三道)가 있다. 양 귀는 비교적 뚜렷하게 윤곽선이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 이 불상이 소홀히 제작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담사터 석등
▲석등 화사석
▲용담사터 석불입상
불신(佛身)은 어깨와 가슴이 떡 벌어져 크고 건장한 기풍을 보여주며, 고려시대 불상의 공통양식인 돌기둥과 같은 기법이 보인다. 두 손은 배부분에서 모으고 있는 듯하며 옷주름은 측면에 간략한 음각선이 보이는 정도이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거신광(擧身光)으로 깨어진 곳이 많고 마멸도 심하여 분명하지는 않지만 군데군데 불꽃무늬(火焰紋)를 조각한 흔적이 남아있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타원형으로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이 불상은 거대한 체구와 간략한 옷주름 표현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유행한 거불상 계통을 따르고 있으며, 그 시대의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불입상
<2008.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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