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대곡리 암각화
한국의 암각화는 주로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영남지방 이외에는 여수 오림동 암각화와 남원 대곡리 암각화만이 발견된 바가 있지만 이곳도 크게 보면 영남권에 속하는 곳으로 볼 수 있다. 검파형 또는 방패문으로 불려지는 이 암각화들은 영천, 고령, 경주를 거쳐 남원과 여수 까지 이어져 내려오다 사라졌다. 검파형 암각화는 대개 앞으로는 냇물이 흐르는 마을 뒷편 봉우리에 위치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곳은 예로부터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제사 등 의식공간으로 기능해온 곳이다. 방패문이나 검파형 암각화는 주로 전쟁에 촛점을 둔 견해이다. 청동기 시대에 전쟁을 통해 식량을 확보하고 구성원들에 대한 지배를 위해서 제사의식을 거행하는 통치자들의 두 가지 행위를 표현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봉황대(鳳凰臺)
▲봉황대
▲봉황대
대곡리 암각화는 남원시 대산면 대곡리 상대마을 입구 좌측에 마치 인근의 기암괴석(奇巖怪石)을 한군데에 모아 놓은 듯이 둥글둥글한 바위 봉우리가 솟아 있다. 특이한 지형 때문에 옛날부터 이곳을 봉황(鳳凰)이 알을 품은 형국이라 하여 풍수의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으로 말해 왔다. 봉황의 알이 모여 있는 것 같은 형세를 가진 이 봉우리를 '봉황대(鳳凰臺)'라고 부른다. 봉황대 주변은 모두 평탄한 지형이기에 멀리서도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봉황대의 바위는 풍화가 상당히 진행된 화강암으로 형성되어 있다. 특히 꼭대기와 서쪽면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치 둥그런 알들이 쌓여있는 듯하다.
▲봉황대 상단 암각화
▲봉황대 상단 암각화
▲봉황대 상단 암각화
암각화는 봉황대 정상부 왼쪽에 걸려진 바위면과 아래쪽으로 10미터 가량 내려온 바위면에 나뉘어 새겨져 있다. 아래쪽 바위에 새겨진 암각은 패형암각이 4개 새겨져 있는데 각기 다른 형태이다. 테두리의 선이 외줄이며 상부 둘레가 V자형인데, 선이 곧고 꺾임이 날카롭다. 내부에 8개 정도의 바위구멍을 새겼다. 뒤편의 바위에는 3개의 패형암각이 새겨져 있는데, 제일 가장자리에 있는 암각은 마모가 심하여 거의 알아볼 수 없다. 사각형에서 허리가 잘록한 형태로 테두리를 겹선으로 새겼으며, 크기와 문양이 다소 다르지만 선각의 골이 넓고 깊게 패인 점은 같다. 연대는 대체로 청동기시대 후기로 추정된다.
▲봉황대 상단 암각화
▲봉황대 상단 암각화
▲봉황대 하단 암각화
이 암각화는 1991년 국사편찬위원회에 근무하는 김광 연구사가 처음으로 발견하여 학계에 보고함으로써 알려진 것이다. 암각화는 두곳에서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암벽의 서쪽에서 길이 400㎝, 폭 140㎝의 벽면에 3문, 다른 하나는 길이 250㎝, 폭 190㎝의 벽면에 4문의 기하문이 모두 횡으로 배치되어 있다. 전자는 두줄의 외곽선으로 검파형(劍把形), 방패형(防牌形)문양을 구획하고 중앙에는 횡으로 선을 돌려 상단과 하단으로 구분하고 그 안에 삼각형과 원형의 기하문이 대칭되게 새겨져 있다. 후자의 경우는 마멸이 극심해 기본적인 문양의 구성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이며, 다만 동일한 4개의 문양이 횡렬로 배열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검파형에서 다소간 변형된 기하문으로 좌우로 대칭되어 있고, 전자와 다른 점은 문양의 상단부가 V자 모양으로 벌어지고 사선문이 외곽선 주변에 돌려져 있다. 이들은 문양의 구성요소나 제작기법에서 다소간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동일한 계통의 암각화로 판단된다.
▲봉황대 하단 암각화
▲봉황대 하단 암각화
▲봉황대 하단 암각화
이 암각화는 일명 ‘패형암각(牌形岩刻)’또는 '검파형암각(劍把形岩刻)'으로 불리는 암각화로 전 세계에서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문양이다. 아직 학계에서는 이 문양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내려지지 않고 있으며, 그 용도나 기능에 대하여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는 매우 독특한 문양의 암각이다. 그중에서도 봉황대의 암각화는 무늬가 매우 다양하며 화려한 면모를 보여준다. 청동기시대에 농경 생산활동을 하면서 농경 생산신에 대한 상징으로 여성상을 조각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봉황대를 제의공간, 제단, 성소의 성격으로 보고 제의 의식 주관자를 상징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봉황대처럼 입지가 별봉인 곳은 그 자체가 신성지역으로 여겨지므로 제의와 관련된 암각화가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풍요생산의 농경제의를 거행할 때 주술적 기원행위를 하면서 지속적으로 갈아파기를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지리적 입지로 볼 때 종족의 영역표시, 종족안보를 기원하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봉황대 하단 암각화
<2008.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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