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온 '국보' - 태조 왕건상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1992년 10월 고려 태조릉인 현릉(顯陵)의 보수 공사 중, 봉분 북쪽 약 5m 지점에서 출토되었다. 발견 초기에는 ‘청동불상’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연구 결과 고려의 태조 왕건의 동상으로 밝혀졌다.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고, 동상과 함께 발견된 옥띠 장식 등이 왕건의 관에 있던 옥띠 장식품과 재질 및 형태가 동일하며, 결정적으로는 태조 왕건의 주상(鑄像)을 능옆에 묻었다는 조선시대의 기록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태조 왕건상은 봉은사에 모셔졌던 것으로, 양식상 10~1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 왕건 청동상
나신(裸身) 형태의 동상이지만, 머리에는 외관과 내관으로 된 관을 쓰고 있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발굴 당시 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금도금을 한 조각과 얇은 비단 천들이 붙어 있었는데, 이는 당초에는 몸에 도금(鍍金)을 하였으며, 비단으로 만든 옷을 걸쳤음을 보여준다.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에 모나리자가 있다면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엔 왕건 상이 있다고 할 만큼 왕건 상은 유물들 중에서도 음미해봐야 할 귀중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왕건 청동상
태조 왕건상이 쓰고 있는 관은 중국 황제가 쓰던 통천관(通天冠)이라고 한다. 통천관이란 하늘로 통하는 관이란 의미이다. 이에 따라 고려왕조가 건국 전기와 중기에는 황제국을 표방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통천관은 중국에서는 태자(太子)나 제후(諸侯), 나아가 조선시대 왕들이 착용한 원유관(遠遊冠)과는 다르다. 통천관은 중국 진나라에서 시작돼 조금씩 형태가 변화하다가 당(唐)나라 무덕(武德) 4년(621) 공포된 거복령(車服令)에서는 '24량(二十四梁) 통천관'으로 제도화하게 된다.
▲태조 왕건 청동상
왕건상이 쓴 통천관이 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만, 관에 붙은 8개 일월(日月)을 상징하는 원형 형상은 중국 황제의 통천관과는 구별된다고 한다. 왕건동상은 화려한 옥대(옥으로 만든 허리띠), 각종 비단천 조각 등과 함께 출토됐다. 이들 비단천 조각은 아직 정밀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으나 옥대는 중국 송나라에서도 천자나 태자가 주로 착용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왕건동상이 착용하고 있었던 복식도 황제의 복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왕건동상은 전체가 아니라 관에만 금 도금을 한 것으로 확인했다.
▲통천관
왕건동상이 앉은키는 84.7cm(의자 면부터 외관 중간까지의 높이)로 성인 남자의 그것과 거의 같은 크기인 데 반해 남근은 길이가 2cm에 지나지 않는다. 왕건동상은 발바닥을 비롯한 신체의 특징 10여 곳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32대인상에 해당하는 특징들이 발견됐다. 그런 32대인상 중 하나가 성기를 몸속에 감춤으로써 겉으로 드러난 남근은 매우 작은 형태를 하고 있는 마음장상(馬陰藏相)이므로, 태조왕건상은 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법원주림'이라는 6세기 중국의 불교 문헌에는 자신의 성별을 의심하는 여인들에게 부처가 법력으로 마음장상에 대해 알게 하는 서술이 있는데, 작을 때는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으나 때로는 매우 커질 수도 있다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
<2006.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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