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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미추왕릉(傳味鄒王陵)

蔥叟 2008. 7. 1. 07:31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미추왕릉(傳味鄒王陵)

 

    신라 김씨왕조를 최초로 왕위에 오른 미추왕의 능으로 알려진 무덤이다. 외형은 원형봉토분이나 봉분 직경 56.7m, 높이는 12.4m에 달하는 고분고총으로 주변의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과 같은 적석목곽분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미추왕의 장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二十三年, 冬十月, 王薨, 葬<大陵>.[一云<什長陵{竹長陵}>]

23년 겨울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대릉[죽장릉이라고도 한다.]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니사금전>

 

在位二十三年而崩,陵在興輪寺東(竹現陵)

보위에 오른지 23년만에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능은 흥륜사 동쪽에 있다.(죽현릉)

 

                                                                                                        <삼국유사 미추왕 죽엽군조>

 

   이 두 기록에 따라 현재의 능으로 비정하였다. 

 

전미추왕릉(傳味鄒王陵)

 

전미추왕릉(傳味鄒王陵)

 

   하지만 미추왕이 사망한 것은 284년으로 당시 경주지역에는 토광목곽묘가 축조되던 시기로서 전미추왕릉과 같은 대형의 고분고총이 등장하기 이전이었다는 것이 정설로서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증거가 서로 상반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삼국사기 신라건국연대가 실제보다 앞당겨졌다는 것이다. 즉,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실제 미추왕의 생존기간은 현재의 기록 보다 7~80년 정도 늦춰 잡아야 한다. 그러면 미추왕의 사망연대는 4세기 후반정도가 되는데 그러게 되면 적석목곽분 초기단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전미추왕릉(傳味鄒王陵)

 

전미추왕릉(傳味鄒王陵)

 

   그런데 현재까지 발굴된 적석목곽분 가운데 가장 고식에 속하는 것은 황남대총이다. 하지만 아직 2/3정도가 발굴되지 않은 상태에서 앞으로 황남대총보다 더 오래된 적석목곽분의 출현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전미추왕릉이 발굴되었을 때 완성된 유물의 양식에 앞서는 선행 단계내지 기원 양식의 적석목곽분일 가능성은 남아있는 것이다. 미추왕의 생몰연대를 늦추지 않으면 왕릉의 양식을 부정해야 하고 왕릉을 인정할 경우 생몰연대를 늦추어야 고고학적 충돌을 피할 수 있다. 

 

전미추왕릉(傳味鄒王陵)

 

전미추왕릉(傳味鄒王陵)

 

한편 전 미추니사금릉을 죽장릉(竹長陵) 또는 죽현릉(竹現陵)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미추왕 죽엽군조(味鄒王 竹葉軍條)>에 전하는 죽엽군(竹葉軍)에 얽힌 이야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제14대 유리왕 시대에 이서국(伊西國) 사람이 와서 금성(金城)을 치매 신라측은 대부대 군사를 동원하여 막았으나 오래 저항할 수 없었다. 돌연히 이상한 군사들이 와서 돕는데 모두들 댓잎사귀를 귀에 꽂고 이편 군사들과 힘을 아울러 적을 물리쳤다. 적군이 물러간 후 그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다만 댓잎사귀들이 미추의 왕릉 앞에 쌓여있음을 보고서야 비로소 선대 임금의 음덕의 공로인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 왕릉을 죽현릉(竹現陵)이라고 불렀다.

 

<삼국유사 미추왕 죽엽군(味鄒王竹葉軍)조>

 

전미추왕릉(傳味鄒王陵) 

 

전미추왕릉(傳味鄒王陵)

 

   삼국유사는 이어서 혜공왕 시대에 김유신의 가야계 사람들이 핍박을 받을 때 김유신과 미추왕의 대화를 전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신라인들이 오릉과 미추왕릉의 존재를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37대 혜공왕 때인 대력  14년(779년)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 람은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장군과 같았다. 그리고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40여명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서 죽현능으로 들어갔다. 조금후에 능 속에서 우는 소리 가 들리듯하고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호소를 하는 말에,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진호(鎭 護)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경술년 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하여 힘쓰지 않으렵니다. 왕께서 허락하여 주십시오." 왕이 대답하기를

   "공과 내가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아무 소리 말고 그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을 청하였으나 왕은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 바람은 이 내 돌아갔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대신 김경신을 보내어 김공의 능에 가서 사죄를 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에 내리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인즉, 나라의 사람들이 그 덕을 기리며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서열을 오 릉의 위에 두어 대묘라고 불렀다.

 

<삼국유사 미추왕 죽엽군(味鄒王竹葉軍)조>

 

 

 

<2008.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