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검총(劍塚)
신라 고분 가운데 최초로 본격적인 학술적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고분이다. 1916년 세키노데이(關野貞) 등이 발굴하였을 때 4세기 경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와 철검(鐵劍)만이 출토되어 검총(劍塚)이라고 이름지었다. 하지만 당시의 발굴은 매장주체부까지 전면적인 발굴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어 추가적인 발굴조사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적석을 들어내고 유물을 수습하였으며 유물층의 밑, 즉 고분의 기저부까지 조사한 전면적인 발굴이었다는 주장도 일부 있었다.
▲검총(劍塚)
검총은 직경 44.5m, 봉분의 높이 9.7m로 금관총이나 서봉총과 비슷하며 봉토의 축조수법에서나 적석부와 遺骸部의 하부구조에서도 황남대총이나 천마총과 같은 대형분에서만 볼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검총에 있어서 목곽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있었다면 그 규모가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처럼 검총은 외형이 대형분이고 각부의 규모나 축조수법등도 최고위 신분의 묘형이지만 출토된 유물은 철기와 토기 몇 개에 지나지 않는다. 금은동 제품은 출토되지 않았다. 발굴된 부위가 좁았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지금가지 발굴된 대형분들과 비교할 때 검총의 이 출토유물은 너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출토 유물 가운데 철검은 다른 고신라 적석목곽분에서는 출토된 예가 없고 고분고총기 이전에 사용되었던 것이어서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철검이 활발하게 사용된 시기는 이른바 토광묘시기인데 적석목곽분은 고신라 마립간시대에 축조되던 고분으로 편년되는 바 검총에서 이전 시기의 철검이 출토된 것은 마립간 시기 이전의 고분을 이 시기에 대형화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 19년조(435년)의 기사는 주목되는 부분이다.
○十九年, 春正月, 大風拔木. 二月, 修葺歷代園陵. 夏四月, 祀始杞{祖}廟.
19년 봄 정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2월, 역대의 능원을 보수하였다. 여름 4월, 왕이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전>
이 기록은 눌지왕이 역대 유력자들의 무덤을 대형고분으로 확대 개축하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보았을 때 검총은 후세에 수축된 고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검총의 부장품은 원래 가지고 있던 물건에 수축시 의식에 사용된 것이 포함된 정도이고, 외형은 개축 당시에 많이 축조되던 대형분으로 고쳐진 고분이 아닐까 여겨진다.
하지만 그보다는 2월에 분 강풍 때문에 무너지거나 훼손된 능원을 보수한 수준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리고 4월에는 보수공사의 완료를 알리는 제사를 시조묘에서 지냈을 것이다. 역대 신라왕들이 즉위 19년에 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라는 점도 이러한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검총(劍塚)
그리고 눌지마립간 19년조 기록에서 말하는 '역대'란 누구까지를 말하는 것인지가 의문이다. 김씨왕조 성립이전의 박씨왕들과 석씨왕들까지 포함하는지를 살펴보자. 신라에서 김씨왕조가 성립될 초기의 상황은 왕권이 김씨내부에서도 미추에서 내물로, 내물에서 실성으로 서로 다른 실력자들에게 혼란스럽게 이동하였다. 그 와중에서 내물의 장자인 눌지는 실성왕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비로소 내물왕계의 왕권세습을 확립하였다. 그러한 눌지가 역대원릉을 수축한 것은 내물계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적 조처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역대'란 다름 아닌 내물계의 직계조상으로 추정된다.
<2008.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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