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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흥사터 출토 사리장엄구(舍利藏嚴具)

蔥叟 2008. 3. 25. 09:46

부여 왕흥사터 출토 사리장엄구(舍利藏嚴具)

 <국립부여박물관>

 

   왕흥사터 목탑터의 심초석에 마련된 석함 안에는 3중의 사리장엄구가 안치되어 있었다. 황금사리병은 은으로 만든 사리 외병에 들어 있었으며, 은제사리병은 다시 청동사리함(높이 10.3㎝, 폭 7.9㎝)에 담긴 채로 출토되었다. 하지만 세 겹의 사리장엄구 안에서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왕흥사터 사리장엄구(舍利藏嚴具, 백제 7세기)

 

   청동사리함은 두들겨 만든 것으로 보이는 몸통과 보주형 손잡이가 납땜된 뚜껑으로 돼 있으며 내부의 은제사리병과 금제사리병 역시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금, 은병은 몸통이 강조되고 구연부가 날카로운 전형적인 남북조시대형이며 보주 모양 손잡이 주변으로 여덟 장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청동사리함 몸체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王昌爲亡王子 立刹 本舍利二枚葬時 神化爲三(정유년(577년) 2월 15일, 죽은 왕자를 위해 백제왕 창(昌·위덕왕의 생전 이름)이 절을 세웠다. 사리를 2매 넣고자 했는데, 부처님의 조화로 사리가 셋이 됐다)”는 내용이다. 이로서 그동안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 35년)에 낙성된 걸로 알려졌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 연대가 577년(위덕왕 24년)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확인됐다. 또한 왕흥사가 위덕왕의 선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진 절이라는 학계의 일반적 추론과 달리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든 절임도 밝혀졌다. 그리고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 태자 외에 또 다른 왕자를 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청동 사리함(靑銅舍利函, 백제 7세기) 

 

   사리함의 명문과 삼국사기의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두고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명문이 거짓을 쓸 수 없으니 사서 기록이 잘못됐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발굴품 명문의 연대가 <삼국사기> 기록과 엇갈린 사례는 처음 있는 일이다. 학계에선 사서가 완전히 틀렸다는 단정론, 탑만 일단 세운 것을 절을 세운 것으로 명문이 해석했다는 견해 등이 나온다. 사서에 언급된 왕흥사보다 선행하는 형식의 건물이 있었고, 그게 후대 법왕 때 왕흥사란 절로 낙성됐다는 주장이다. 명문 가운데 ‘입찰본사리이매장시’(立刹本舍利二枚葬時), 곧 사찰을 세우고 본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라고 해석되는 대목을 두고 이런 행위만으로 절을 건립한 것으로 볼 것인지, 절을 지을 때 탑을 먼저 세운 뒤 나머지 금당, 강당들을 잇따라 세운 것을 절을 세운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청동 사리함 명문(사진/문화재청)

 

   모든 사찰이 탑, 금당, 강당을 한 짝에 갖춰야 온전한 절의 건립으로 고대인들이 간주했는지를 따져보는, 간단치 않은 문제다. 고대사 연구자인 노중국 계명대 교수는 “사찰을 만든 시기, 세운 이유와 주체도 사리기 명문과 <삼국사기>의 기록이 각각 달라 격론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됐다”며 “하지만 사서가 무조건 틀렸다고 단언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한 학예관도 “<삼국사기>의 왕흥사 건립 연대가 완전히 틀린 것으로 확인되면 <삼국사기> 기년의 신빙성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며 “결론 내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금제ㆍ은제사리병(金製ㆍ銀製舍利甁, 백제 7세기)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황금 사리병 안에는 사리가 없고, 맑은 물만 고여 있었다는 사실도 논쟁거리를 제곤하고 있다. 후대에 사리기를 손댄 흔적이 전혀 없어 사리의 행방에 대하여 의문을 풀어야하는 숙제가 남게 되었다. 사리기에 사리가 없는 경우는 꽤 된다. 부식된 구멍으로 사리알이 빠져나가거나 외부의 압력이나 화학작용에 의해 녹거나 사라지는 경우도 가정할 수 있다. 하지만 단단한 사리는 고온의 화장을 견뎌 생긴 것으로 물에 녹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사리병 뚜껑 덮개의 긴 틈 등을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갔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도 한다. 황금 사리병을 싼 은 사리병 속에서 작은 알갱이 한 개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사리의 행방에 대한 의문을 풀어줄 열쇠가 될지 주목된다. 

 

▲금제ㆍ은제사리병(金製ㆍ銀製舍利甁, 백제 7세기)

 

   청동 사리함에 있는 문제의 명문을 새긴 방식도 관심을 끌고 있다. 얼핏 상식대로 끌 등으로 여러 번 쫀 것이 아니라 ‘도자’라 불리는 옛 필기용 칼을 펜이나 붓처럼 놀려 쓴 것으로 밝혀졌다. 즉, 사리함 명문은 목간의 글씨처럼 여러 차례 칼을 놀려 깎아낸 것이 아니라 도자를 써서 한 번 붓질로 한 획을 완성하듯이 쓴 것이라고 한다. 이런 필기 방식이 경이로운 것은 사리함의 재질인 청동이 돌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가는 정이나 끌로 쪼아도 원하는 모양이나 글자를 내기가 힘든데, 얇은 칼날을 꾹꾹 눌러 당시 중국 남북조의 예서·해서 글씨체를 조화시키고 토속적 멋까지 가미했다는 것이다. 칼로 눌러서 단단한 재질에 글씨를 써야 하므로 손과 팔의 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야 하며, 재질에 대한 이해와 조형적 감각은 물론 서예도 어느 정도 섭렵해야 이런 명문 글씨가 가능하다고 한다. 

 

 

 

<2008.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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