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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흥사터(王興寺址)

蔥叟 2008. 3. 24. 08:12

부여 왕흥사터(王興寺址)

 

   왕흥사터는 부여군 규암면 신리 부소산성에서 백마강 건너편 산기슭에 있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백제왕실의 원찰이었다. 지금까지 삼국사기 백제본기 법왕조 기사 "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2년 봄 정월에 왕흥사를 창건하고 중 3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와 역시 삼국유사 백제본기 무왕조 기사 "三十五年 春二月 王興寺成(35년 봄 2월에 왕흥사가 준공되었다)"는 기록에 의거 서기 600년에 창건을 시작하여 634년에 준공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왕흥사터 어도(御道)

 

▲왕흥사터(王興寺址)

 

▲목탑터

 

▲왕흥사터(王興寺址) 

 

   또 삼국유사 법왕금살(法王禁殺)조에는 "明年庚申, 度僧三十人, 創王興寺於時都泗泚(沘)城[今扶餘], 始立栽而升遐. 武王繼統, 父基子構, 數紀而畢成. 其寺亦名彌勒寺, 附山臨水, 花木秀麗, 四時之美具焉. 王每命舟, 沿河入寺, 賞其形勝壯麗(이듬해 경신년에는 30명의 도승을 두고 당시 서울인 사비성에 왕흥사를 창건하려 했으나 겨우 터를 닦고서는 세상을 떠났다. 무왕이 왕위를 계승해서 아버지가 닦은 터에 아들이 일으켜 수기를 지나서 완성했다. 그 절을 또한 미륵사라고도 한다.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보는 곳이었는데, 화목이 수려하여 사시의 아름다움을 다 갖추었다. 왕은 항상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들어와 장엄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절에 매우 아름다웠음을 알 수 있으며 절의 입지도 산아래 백마강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유사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6월조 기사에도 "王興寺衆僧皆見 若有船楫 隨大水 入寺門 (왕흥사의 여러 중들이 모두 배의 돛대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 문간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왕흥사가 강가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왕흥사터 복원도(사진/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왕흥사터(王興寺址)

 

▲왕흥사터 와편

 

▲기와조각(瓦片)

 

▲기와조각(瓦片)

 

   또 왕흥사의 폐사와 관련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조 기사 "七年十一月五日 王行?攻王興寺岑城 七日乃克 斬首七百人(7년 11월 5일, 왕이 계탄을 건너 왕흥사 잠성을 공격하였다. 왕은 7일 마침내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7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로 보아 이때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오랜 세월 땅 속에 묻혀 있었다. 1934년 부여 규암면 신리 일원에서 '王興'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편과 석조불좌상, 토기조각 등이 발견되어 이곳에 왕흥사터임이 밝혀졌다.

 

▲기와조각(瓦片)

 

▲기와조각(瓦片)

 

▲금당터

  

▲금당터 초석

 

   2000년 백제문화권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왕흥사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왕흥사의 수수께끼가 하나식 벗겨지기 시작하였고, 2004년 5차 발굴조사 후에는 탑과 금당이 남북일직선상에 있는 일탑일금당의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2007년 8차 발굴조사에서는 폭 13m, 길이 60m가 넘는 장대한 어도(御道)가 발굴되어 어도와 목탑, 금당이 일직선상에 위치하여 왕이 배를 타고 백마강을 건너와 어도를 통하여 절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35년조 기사에 나오는 "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 入寺行香(그 절은 강가에 있었으며 채색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는 기록과도 부합하는 것이다. 

 

▲금당터 초석

 

▲금당터 초석

 

▲금당터 초석

 

▲강당터

 

   또한 2007년 발굴조사에서는 청동사리함과 은제사리병 그리고 금제사리병이 목탑터에서 출토되었는데 그중에서 청동사리함 외벽에 29자의 명문이 새져져 있었다. 명문의 내용은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정유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것이다. 명문의 내용에 의하면 왕흥사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600년이 아니라 위덕왕 24년인 577년임이 확인되었으며 지금까지 알려졌던 위덕왕이 선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이 아니라 죽은 왕자를 위해 지은 절이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위덕왕에게는 아좌태자 뿐만 아니라 또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지게 되었다. 

 

▲강당터 초석

 

▲기와조각(瓦片)

 

▲기와조각(瓦片)

 

▲왕흥사터에서 바라본 낙화암

 

   왕흥사 발굴조사는 2008년도에서 계속될 예정인데 이번에는 금당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조사가 이뤄지게 되며 사리함을 출토한 목탑터와 그 주변 축대, 그리고 진입로와 관련된 석축 유구, 회랑터 등을 추가로 조사한다. 연구소 측은 이번 조사를 통해 왕흥사 가람 배치에 관한 전체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백마강과 낙화암

 

▲백마강, 수북정이 바라보인다

 

 

 

<2008.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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