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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고분 순례 - 서울 방이동 고분군(芳荑洞古墳群)

蔥叟 2008. 2. 4. 07:40

백제고분 순례 - 서울 방이동 고분군(芳荑洞古墳群)


   방이동 고분군은1971년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연구소의 합동지표조사 결과 8기의 고분이 확인되었고, 1975년 잠실지구 신시가지 조성계획에 따라 6기의 고분이 발굴 조사되었다. 1983년 서울시의 복원공사로 현재는 고분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대부분 도굴되어 남아 있는 유물이 매우 적지만, 고분의 구조와 형태는 그대로 남아 있다. 낮은 구릉에 위치한 이 고분들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사방의 벽을 돌로 쌓아 올린 뒤 한쪽에 널길(羨道)을 내고 바깥을 흙으로 덮었다.


▲방이동 고분군

 

   고분들이 발견된 주변지역이 백제 초기의 수도가 있었던 지역이고, 몽촌토성·풍납토성·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가락동고분군 등이 모두 백제의 유적들이라는 점을 들어 방이동고분 역시 백제시대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4호분·5호분·6호분 등에서 출토된 회청색경질토기인 굽다리접시[高杯]가 전형적인 신라양식을 띠고 있고, 널길의 위치와 관대(棺臺)의 방향 등이 경주지역의 무덤들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이 무덤을 쌓은 주인공들은 신라 사람들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같은 점을 고려할 때 방이동고분은 백제와 신라간의 교류관계, 혹은 신라의 북진에 따른 한강유역 진출을 증명해 주는 유적지이다.  

 

▲방이동 제1호분

 

   방이동 고분군은 구조면에서 석촌동의 적석총들과 판이하게 구별되는 석곽묘 내지는 유연도식(有羨道式) 석실묘이다. 석촌동의 적석총들이 평지에서 만들어진 데 반하여 방이동 석실묘들은 구릉에 축조되었다. 같은 지역내에 시대를 달리하는 고분들이 시대가 오랜 것이 구릉 높은 곳에, 시대가 늦은 것이 점점 낮은 곳에 만들어졌음이 주목된다. 또한 시대가 오랜 것은 소형 석곽이고 거기서 발전하여 대형 유연도식 석실로 변해 간다. 두향(頭向)도 처음에는 동향이었다가 나중에 북향으로 바뀌었다고 생각되며 석실 남벽에 연도(羨道)가 생긴다. 또 특색 있는 터널식 석실묘가 발견되었으며 그 석실내의 일부를 칸막이하여 부곽(副槨)으로 쓰여진 예가 발견되었다는 것도 특기할 사실이다.

 

▲방이동 제1호분

 

   방이동의 석곽 · 석실묘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석촌동 적석총에 묻힌 사람들을 북에서 남하해 온 이주민들이라고 부른다면, 이 이주정복자들과는 출신 성분이 달랐던 사람들로 보아야 할 것 같으며 그렇기 때문에 서로 멀지 않은 지역이긴 하지만 서로 다른 곳에 따로 묻혔던 것이다. 방이동 고분인들은 석촌동 적석총인들이 자취를 감추고 난 후에도 대대손손 백제 · 신라의 통치를 받으면서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문물도 그 때그 때 수용해가며 살았다. 그런 장기간의 세월 가운데 4∼5세기에 축조된 것이 5호분이고 그 이후 4호, 6호 등이 만들어졌으며 6호분은 6세기말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방이동 제3호분

 

   시대가 오랜 것이나 시대가 늦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나간에 한강변에서 발견된 고분들은 피장자(被葬者)가 정치적 지배 계급이었을 것이라고 추리할 만한 유물이 별로 출토되지 않고 있다. 여주 매룡리 2호 석실묘에서 금동이식(金銅耳飾) 2점과 일도자(斧刀子) 2점이 발견되었을 뿐이고 나머지 29기의 각종 고분에서는 마구(馬具)라든지 철도(鐵刀) 같은 통치 계급의 유물이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즉 통치자급의 유물이 한강 고분들에서 발견되지 않는 점은 지금까지 한강변에서 발견된 적석총 · 석곽묘 또는 유연도식 석실묘 등이 적어도 이 지방을 통치했던 사람들의 것이 아닐 것이라고 일단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앞으로 새로운 자료가 출현하지 않는다면 고고학적인 입장에서 보는 초기 백제시대의 국가 형태는 강력한 지배자가 군림했던 구조는 아닌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시대가 더 내려가서도 한강변은 지정학적으로는 삼국간의 요충이었는지 모르나 물질문명상으로는 상당히 변방에 처해 있어서 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은 당시 경주 또는 후대의 공주 사람들의 생활보다 훨씬 뒤떨어지고 소박한 것이었음을 출토 유물의 현황을 통하여 알 수 있었다.

 

▲방이동 고분군

 

   방이동 1호분의 구조와 축조 양식을 고찰해 보면 처음 지맥을 이용하여 남북향하여 일정한 길이로 굴진(掘進)한 다음 석실의 바닥부를 마련하고 벽면을 축조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최종 천개석(天蓋石)을 올린 후 그 상부에 약 2m 정도의, 봉토를 마련하였다고 본다. 발굴 당시 경(徑) 약 10m, 높이 약 5m의 봉분이 형성되어 있었다. 방이동 일대의 백제시대 유적은 백제가 한강변을 중심하여 고구려와 대항해서 삼국의 정립을 보았던 한성시대에 속하는 고지에 포함된다. 즉 백제가 고구려 세력에 밀려 웅진(공주)으로 천도하기 전까지의 A.D. 350년∼474년 사이의 약 120년 간의 시기에 속한다. 당시의 백제고분으로 석촌동 · 가락동 · 중곡동 · 여주 매용리 · 여주 보통리 소재 고분 등이 알려져 있다.

  

 

 

 

▲방이동 고분군

 

   이상과 같이 주변 일대의 이미 조사된 석실고분의 구조를 종합해 보면 방이동 1호분과 뚜렷하게 동일한 것은 없다. 이것은 석실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벽석(壁石)의 재료는 같으나 연도(羨道) 처리, 현실(玄室) 천장부 개석, 현실바닥 처리, 시상대(屍床臺)의 마련 등에서는 서로 상이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고분이 선행하고 후행하는 것인지는 앞으로 밝혀져야 할 연구과제이다. 방이동 1호분이 연도를 서벽에 붙여서 마련한 것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데, 웅진시대에 속하는 송산리 고분에서 보이는 연도가 동벽에 정해져 편재하며 천장개석이 판석 1매 석으로 처리된 것과 유사점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으나 반드시 이와 관련된다고는 하기 힘들다. 그러나 방이동 1호분과 여주 보통리 1호분의 관계는 연도와 바닥 처리가 상이하나 축조방법이 같음을 볼 때 서로 깊은 관련성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방이동 동남쪽 고분군

  

   방이동 5호분의 두향(頭向)은 장축이 동서이고 단축은 남북이데, 석곽의 길이로 보아 시신은 동침(東枕)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토기 3점이 모두 곽의 남서 모서리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서도 시신은 곽의 북쪽에서 머리를 동쪽, 다리를 서쪽으로 하고 누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방이동 고분군 중 발굴조사된 것이 1, 4, 5, 6호분으로 모두 4기인데, 그 중에서 1호, 4호, 6호분은 장축이 남북 방향인데 5호분만은 동서향이다. 뿐만 아니라 6기 중 5호분이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고 또 구조면에서도 모두 석실인데 이 5호분만이 소형 석곽이다. 따라서 5호분이 전 고분군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토기도 고식(古式)의 회색토기가 출토되어 더욱 시대가 오랜 것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방이동 동남쪽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 중 동남쪽 낮은 언덕 경사면에는 4기의 고분(제7,8,9,10호분)이 자리 잡고 있다. 제7호분과 제8호분은 1988년에 동남쪽 고분 2기(제9,10호분)의 보수, 정비작업 중 분구 기저부와 내부 구조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내부 구조는 포갠 돌로 장방형 석곽을 축조하고 시신을 위에서 안치하는 수혈식 석곽(竪穴式 石槨)이었으나 이미 파괴되고었고, 제8호분은 장방형의 적성 모양으로 보아서 제7호분과 같은 구조 형식의수혈식석곽으로 생각되나 고분의 보수와 정비에 작업의 목표가 설정되어 있어 확인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7호분의 분구의 크기는 지름 10m, 높이 약 2.5m이고, 제8호분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고분이나 제9호분은 보수 정비작업 중 분구 정상부에 노출된 천장부의 뚜껑 돌에 의하여 석실분임을 알 수 있었다. 제 9호분의 크기는 지름 19m, 높이 3.8m이고 제10호분은 지름 16m,  높이 3.3m이다.

 

 

 

<2008.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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