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낙서문화권

성주 세종대왕 왕자 태실

蔥叟 2007. 12. 19. 05:31

성주 세종대왕 왕자 태실

 

   태실(胎室)이란 태를 묻는 곳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태봉(胎封), 태묘(胎墓) 등으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태를 민가에서보다는 왕실에서 더 중요시하고 소중하게 다루었다. 왕실에서 더 중요시하고 소중하게 다루었다. 이렇게 태를 처리하는 데 정성을 다하는 것은 사람이 나는 시초에 태로 인하여 자라게 되는 것이며, 더욱이 그 어질고 어리섞음과 성(盛)하고 쇠(衰)함이 모두 태에 관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하게 취급하여 전국에서 길지를 골라 태실을 만들어 안태하였다. 그것은 왕실의 융성 즉 국운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왕자태실

 

*세조 가봉비

 

*진양대군(세조) 태실

 

   조선시대에 왕실에서 만들었던 태실은 음택(陰宅) 못지 않게 풍수지리에 따라 육안태법(六安胎法)에 따라 명당으로 보이는 곳을 선정하였다. 또한 태실지를 정하는 일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이는 태의 처리가 다음 왕자와 왕녀를 생산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믿음과 국운과 관련하여 왕실의 번영과 권위의 상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국의 길지를 골라 태를 묻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진양대군(세조) 태실 기단 연화문

 

*진양대군(세조) 태실 옥개석 연화문

 

*안평대군 태실

 

   첫째, 태를 좋은 땅에 묻어 좋은 기를 받으면 그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하고 왕업의 무궁무진한 계승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것, 둘째, 기존 사대부나 토호들과 일반 백성들의 명당을 빼앗아 태실을 만들어 씀으로써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요인을 없애자는 의도였다. 셋째, 태실을 전국 도처에 명당에 조성해 왕조의 은택을 일반 백성까지도 누리게 한다는 의도였다. 즉 왕조와 백성간의 유대감을 강화시켜 보자는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넷째, 태실이 조성되는 지역에 특혜를 주어서 왕실에 충성을 하고 백성들이 왕종의 태실을 자기 마을에 모시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하기 위함이었다. 

 

*임영대군 태실

 

*광평대군 태실

 

*금성대군 태실

 

   태실의 선정조건은 무덤을 선정하는데 있어서의 명당의 조건과는 달리 야중(野中)의 원봉(圓峰)을 택해서 산 정상에서 내맥(內脈)이 없고 용호(龍虎)를 마주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국속으로 되어 있었다. 태실의 주위에는 금표를 세우고 금표 내에서는 채석, 벌목, 개간, 방목 등의 행위를 일절할 수 없었다. 금표의 범위는 왕은 300보(540m), 대군은 200보(360m), 기타 왕자와 옹주는 100보(180m)로 되어 있었다.  

 

*평원대군 태실

 

*영흥대군 태실

 

*세손(단종) 태실

 

   우리나라 태실로서는 규모가 가장 큰 세종대왕 왕자 태실은 세종대왕의 왕자(문종 제외)와 원손인 단종의 태를 안장한 곳이다. 높이 140cm의 화강암으로 되어있으며 지하에 석실을 만들어 그 속에 태항(胎缸)과 태주(胎主)의 이름 및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을 넣고 지상에는 기단, 간석, 옥개의 형식을 갖춘 석조물을 안치하는 한편 어느 왕자의 태실이라는 표석을 세웠다. 세종 21년(1439)에 뒷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을 비롯한 세종의 적서 17왕자와 단종(세손) 등 도합 20여기의 태실을 설치하였다. 

 

*세손(단종) 태실은 멀리 떨어져 있다

 

*영해군 당 태실

 

*영양군 거 태실

 

  그러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니 이에 반대하여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수양의 동복동생 금성대군과 배다른 동생 한남군, 영풍군, 그 사건에 무고로 연좌된 화의군 및 계유정란에 죽은 동복동생 안평대군의 태와 장태비는 세조 3년(1457)에 태봉 아래로 파내어 쓰러뜨려졌다. 또 경신년(1920) 홍수에 유실되어 지금은 19기만 남아있다. 1975년 태봉 밑에 넘어져 있던 5기의 기단석을 찾아 원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세조가 등극한 뒤 예조판서 홍윤성이 세조의 태를 이곳에 묻엇다는 글을 지어 비를 세조의 태비 앞에다 세웠으나 지금은 심하게 마모되어 판독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영해군 장 태실

 

*영풍군 태실

 

*익현군 태실

 

   형식을 보면 화강암으로 깍은 19기의 태실은 조선 태실 의궤형식으로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그 곳에 백자로 된 태호(胎壺)가 들어있고 이 속에 태항(胎缸), 그 위에 기단석과 신석(身石), 옥개석 등으로 되어 있다. 19기의 태실은 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원손(단종), 화의군, 계양군, 의창군, 한남군, 밀성군, 수추군, 익현군, 영풍군, 장(후에 영해군이란 군호를 받으면서 당으로 개명), 담양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태실들은 앞줄과 뒷줄로 되어 있다. 뒷줄에는 수양대군을 비롯하여 대군들 적자와 원손(단종)의 태실을 두고, 앞줄에는 화의군과 여러 후궁들의 소생인 군들의 태실이 배치되었다. 일반적으로 뒷줄을 상석으로 삼는 원칙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수춘군 태실

 

*밀성군 태실

 

*한남군 태실

 

   1928년에 일제는 이왕직(李王職)을 통하여 전국의 태실을 관리하는데 어려움이 잇다는 이유로 전국의 태실 54기를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마구잡이로 모아 놓았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의 멸망을 눈으로 보게하고, 길지에 조성된 태실을 마구 파해쳐 왕실과 국운의 융성을 막아보려는 의도를 드러내었다. 당시 풍수지리를 신봉하던 조선의 백성들에게 조선 국토의 혈(穴)을 끊어 버리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태실을 철거한 뒤 거기에 있던 석물들과 자리는 비교적 돈 많은 지방 토호세력들에게 분할하여  왕조의 권위를 여지없이 짓밟아버렸고 희망자가 없을 경우에는 태실의 痕迹조차 없애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의창군 태실

 

*계양군 태실

 

*화의군 태실

 

   우리의 조상들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인식으로 자연회귀 사상을 실천하면서 후일의 복록(福祿)을 기원하는 기복신앙의 마음가짐으로 생활하여 온 것 같다. 집을 지어도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하였고 동산을 꾸며도 어디가 인공이고 어디가 자연인지 모르게 하였으며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문화를 일구어 왔다. 우리의 동산에는 폭포는 있어도 분수는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 세종대왕왕자태실의 일부 주인들은 불행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고 한 맺힌 돌과 애절한 사연이 깃든 것으로 보아 세사(世事)가 우리의 소망대로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교훈을 보는 것 같다.

 

 

 

<2007.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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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宗大王 王子 胎室 碑文.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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