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갈항사터(葛項寺址)
갈항사는 신라 효소왕 때인 692년 승전이라는 고승이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다른 사찰들처럼 중건이나 중창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고문헌에 따르면 조선 중기까지에도 갈항사라는 표기가 남아있었다고 하니, 그 이후 갑작스런 폐사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곳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과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있다. 그러나 갈항사 동서삼층석탑은 1914년 쌍탑중 동탑의 기단부에서 4줄짜리의 금석문이 알려지게 되는데, 이후부터 도굴꾼에 의해 탑내 유물이 도난당하고, 결국 탑들은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지금은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동탑에 새겨진 금석문은 신라 경덕왕(758년) 때 세워진 탑임을 알리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수많은 신라 석탑 가운데 건립연대가 확실하고, 아울러 금석문이 남아있는 것으로는 유일한 석탑이다.
*오봉리 석조석가여래좌상
*오봉리 석조석가여래좌상
*오봉리 석조석가여래좌상
오봉리 석조석가여래좌상이라는 명칭이 붙은 갈항사터 석불은 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된 갈항사의 금당 뒤에 있던 여래좌상이다. 현재 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고, 불상은 보호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 둥근 얼굴에 미소를 디고 있으며, 눈, 코, 입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다. 가슴이 발달하였고 허리가 잘룩하며,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굴곡있는 신체에 밀착되어 부드러운 옷주름선을 나타내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아래를 가리키고 있지만, 오른 손목과 손등 뿐이며 왼손도 일부 깨졌다. 양손과 하반신 일부가 손상되었지만 형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불상의 받침대는 위로 향한 연꽃이 새겨진 상대석만 남아있고, 중하대석과 불상 뒤 원광인 광배는 유실되었다. 전반적으로 온화하면서 세련미가 있는 8세기 중엽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상과 같이 있던 석탑의 기단부에 신라 경덕왕 17년(758)이라는 조성연대가 새겨져 있는데, 불상 역시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 동쪽과 서쪽에 있던 3층석탑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는데, 이 석탑과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조석가여래좌상 상호
*석조석가여래좌상 연화대
*오봉리 비로자나불좌상
석조 석가여래좌상이 전각 안에 숨겨지다시피 모셔져 있다면 사시사계를 온 몸으로 느끼며 바깥세상을 맘껏 만끽하고 있는 석조 비로자나불도 있다. 이 불상은 목 아래쪽은 옛 그대로 인듯 한데 머리는 근래의 것으로 얹혀져 있다. 더구나 감옥같은 쇠창살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어 동물원 우리 안의 동물처럼 안스러운 느낌이 먼저 든다. 그래도 좋단다. 저 전각 안에 있는 답답한 석조여래보다는 자기가 낫다는 듯 한껏 표정이 밝다. 흉물스런 느낌은 지울 수 없지만, 표정 하나는 일품이다.
*갈항사터 전경
*갈항사터 동탑지
<2007.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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