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장릉(莊陵)
장릉(莊陵)은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능이다. 세조 3년(1457) 6월 집현전 학사 성삼문, 박팽년 등이 상왕복위사건으로 참형을 당한 6월 21일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었고 그 다음날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2개월 남짓 기거하던 중 홍수로 인하여 관풍헌으로 옮겼다. 세조 3년(1457) 다섯째 삼촌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계책이 발각되자 노산군은 폐서인이 되었고 그해 10월 24일 사사(賜死)되었는데 17세의 어린 나이였다.
단종의 유해가 동강에 흘렀는데 영월호장 엄홍도가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는 충정으로 옥체를 수습하여 이곳에 밀장을 하였다. 중종 11년(1516) 노산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있었고 중종 16년(1541)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의 현몽에 따라 노산묘를 찾고 수축봉제하였다. 숙종 24년(1698)에 추복하여 묘호를 단종으로 하고 능호를 장릉이라하였다. 단종이 승하한지 241년만에 왕실의 정례(正禮)를 되찾게 되었다. 능상의 석물들은 후릉(厚陵)의 예를 본받아 행하라는 교지에 따라 능전에 상석 1과 그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있고 그 한단 아래에 사각옥형 명등석 1좌와 문인석과 마석 각 1쌍이 상면 설치되어 있고 무인석은 없다.
*장릉(莊陵)전경
*배식단(配食檀)
배식단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조사위, 환자군노, 여인위?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한신 때 제사를 올리는 제단으로 제례를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배식단사(配食檀祠)
배식단사는 정조 15년(1791)에 건립한 것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 조사위 198인, 환자군노 28인, 여인위 6인을 합하여 264인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수복실(守僕室)
수복실은 능과 경내를 관리하는 능지기가 기거하던 곳으로 영조 9년(1733)에 정자각과 함꼐 지은 것이다.
*홍살문
*신도(神道)와 어로(御路)
신도는 신(神)만이 다니는 길이며 왕로는 초헌관이나 일반제관들이 다니는 길이다.
*단종비각
단종비각은 숙종 24년(1698)에 노산묘를 장릉으로 추봉함과 동시에 세워졌다. 비각 안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 端宗大王 莊陵)이란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단종대왕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단종비
*정자각
정자각(丁字閣)은 영조 9년(1733)에 건립되었으며 단종대왕 제향시 제물을 차리는 곳으로 집의 모양이 한자의 丁자와 같다하여 정자각(丁字閣)이라 부르고 있다.
*정자각
*정자각
*정자각
*정자각 기둥
*영천(靈泉)
영천은 장릉의 제사를 지내는 우물로서 정조 15년(1791)에 군수 박기정이 조정에 보고하여 장릉 제정(祭井)으로 칭하게 되었다. 보통 때에는 조금씩 샘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때, 제향을 지낸 때에는 물이 많이 용출된다. 우물의 구조는 사방이 돌담으로 둘러있고 우물 깊이는 1.5m 정도이고 화강석으로 정방형 모양으로 쌓아올려져 있다.
*영천(靈泉)
*능 가는 길
*능 가는 길
*능
*능
*능
*능
*문인석
*장명등
*상석
*망주석
*능에서 내려다 본 모습
<2007.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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