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영동태백문화권

영월 서강 청령포

蔥叟 2007. 8. 28. 07:26

영월 서강 청령포(淸령<水+令>浦)

 

   청령포는 단종이 세조 2년(1456)에 노산군으로 낮추어져 처음 유배되었던 곳이다.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어디로도 나갈 수 없게 되어 있는 곳이다. 청령포는 소나무숲이 울창하고 서강의 물이 맑아 예로부터 ‘영월 8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열일곱 살 소년을 철벽 요새 청령포에 유폐시키고 돌아오는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해 여름에 홍수로 청령포가 휩쓸려, 단종은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청령포는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이므로, 조정에서는 영조 2년(1726)에 일반민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하여 금표비(禁標碑)를 세웠고, 단종이 기거하던 곳을 의미하는 ‘단묘재본(端廟在本) 부시유지(府時遺止)’라는 비문을 새긴 비를 영조 39년(1763)에 세웠다. 
  

   청령포의 관음송은 높이 30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5m이며 지상 1.2m 높이에서 두 가지로 갈라졌고, 갈라진 두 가지의 밑둘레는 각각 3.3m와 2.95m이다. 나무늬 나이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단종(1441~1457)이 유배생활을 할 때 이 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서 쉬엇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서 약 6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이 나무를 관음송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나무가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관(觀), 들어 음(音)나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노산대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에 머무르면서 이곳에 올라 시름에 잠겼던 곳이며 망향탑은 왕비 송씨를 생각하면서 돌을 주워 쌓아올린 탑이라고 한다. 금표비(禁標碑)는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통제하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운 비석으로 동서 삼백척, 남북 사백구십척(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이라 새겨져 있다. 당시 단종에게도 이와 같은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소 앞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가 서 있는데 단종대왕의 거처인 어소가 있었으나 소실되고 영조 39년(1763)에 이비를 세워 어소 위치를 전하고 있다. 비의 총 높이는 162cm로서 1단의 화강석 기단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비 전면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고 음각되었으며 후면에는 '세황명숭정 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 체경서영원영 수석 지명 청령포(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 涕敬書令原營 竪石 地名 靑령浦)'로 음각되어 전면, 측면 각 1칸씩의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청령포 전경

 

*청령포 전경

 

*운무에 휩싸인 청령포

 

*운무에 휩싸인 청령포

 

*운무에 휩싸인 청령포

 

*단종어소

 

*어소

 

*어소

 

*유지비각

 

*서강

 

*서강

 

*행랑채

 

*행랑채

 

*행랑채

 

*청령포 송림

 

*청령포 송림

 

*관음송

 

*망향탑

 

*노산대

 

*노산대에서 본 서강

 

*노산대에서 본 서강

 

*금표비

 

 

 

<2007.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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