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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초월산 숭복사터(初月山崇福寺址)

蔥叟 2007. 7. 22. 05:00

경주 초월산 숭복사터(初月山崇福寺址)

 

숭복사(崇福寺)는 황실의 복을 비는 절이라는 의미로서 본래 이 절은 원성왕릉인 괘릉에 있었던 절이다. 그 당시의 절 이름은 곡사(鵠寺)였는데 여기에는 꽤나 복잡한 사연이 있다고 한다. 38대 원성왕 당시에 이 절 입구에 따오기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곡사라는 절 이름이 유래한 것이다. 일제시대의 자료에 따르면 1940년까지 이곳은 ‘말방리 절터(末方里 寺址)’로만 알려져 왔는데 말방(末方)이란 말은 신라시대의 행정구역 제도인 조방제(조방제)의 ‘마지막 방’이라는 의미로서 신라의 왕경을 모화까지 확대해 볼 수 있는 근거로 제시되곤 한다. 만일 신라왕경이 이곳까지 확대될 수 있다면 당시의 도시규묘가 17만호라는 기록이 사실일 가능성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숭복사터(崇福寺址) 전경

 

*숭복사터(崇福寺址) 동삼층석탑

 

*동탑 팔부신중상 남면

 

*동탑 팔부신중상 서면

  

그러던 말방리 절터에서 1930년대에 입실소학교 교사들에 의해 비편이 발견되었는데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에 신고한 후 낱글자를 판독하고 보관하였다. 그런데 1919년에 총독부에서는 조선 각 지역의 비편을 모아 판독작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탁본해서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을 만들었고 각 사찰의 비문 등을 탁본해서 만든 ‘조선사찰사료집’(朝鮮寺刹資料集)을 제작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역사와 민족정서를 정밀히 분석하여 효율적인 식민지 통치를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이 두 책자가 1920년에 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에 내려왔다. 이후 책자와 비편을 대조하는 작업이 벌어졌는데 그 가운데 ‘유당신라국 초월산 대숭복사 비명(有唐新羅國 初月山 大崇福寺 碑銘)’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최치원이 진성여왕의 명에 의하여 쓴 비명으로 하동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 보령 성주사터의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朗慧和尙白月?光塔碑) 그리고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와 함께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 이 비문이 발견됨으로서 말방리 절터는 숭복사임이 밝혀졌던 것이다.  

 

*동탑 팔부신중상 북면

 

*동탑 팔부신중상 동면

 

*동탑 팔부신중상

 

*동탑 팔부신중상

 

곡사라는 사명에서부터 절이 이곳으로 옮겨져 사명이 숭복사로 바뀌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원성왕은 죽기전에 신하들에게 왕릉을 쓸 자리를 물색할 것을 명한다. 신하들이 알아본 결과 경주 동남쪽의 곡사라는 절터가 왕릉으로 쓸만한 좋은 곳이라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의견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공자가 살던 집도 그대로 전하는데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절을 빼앗을 수는 없다는 의견이었으니 이는 당시에 사유재산 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다른 의견은 불교는 흉한 것도 길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 데 곡식을 주고 절을 매입하여 이곳에 왕릉을 쓰자는 의견이었다. 결국 두 번 째 의견이 채택되어 곡사는 현재의 숭복사 자리로 옮겨졌고 원래의 자리에는 원성왕릉이 들어섰던 것이다.

 

*서삼층석탑

 

*서탑 팔부신중상 남면

 

*서탑 팔부신중상 서면

 

*서탑 팔부신중상 북면

 

절이 옮겨진 후에도 곡사(鵠寺)라는 사명이 계속 이어지다가 경문왕대에 중창하면서 숭복사로 개명을 하고 조각이 화려한 탑도 이때에 세우게 된다. 1930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온 숭복사터 귀부는 금당터의 동쪽 언덕에 남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고 한다. 귀부의 등에 있는 비좌의 홈이 매우 넓은데 성덕왕릉과 흥덕왕릉의 귀부에 있는 비좌 다음으로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탑 팔부신중상 동면

  

*서탑 팔부신중상 아수라

 

*서탑 팔부신중상 건달바

 

*금당터 석재

 

동서 쌍탑의 상층기단부에는 화려한 팔부신중상이 조각되어 있다. 팔부신중은 사천왕의 권속과 약사여래의 권속으로 나뉘어 지는데 그 명칭이 조금씩 다르다. 중국에는 팔부신중상이 회화로는 그려지나 조각은 남아있는 것이 없으며 일본의 팔부신중상은 우리와 또 다르다고 한다. 신라에 팔부신중상이 처음으로 조각되는 것은 남산의 창림사 석탑을 필두로 하여 담엄사, 남산리 서탑, 그리고 천관사 석탑의 팔부신중상 순서로 등장하는데 800년 이후로는 이곳 숭복사와 청도 운문사 등에도 나타나게 된다. 팔부신중 가운데에서 삼두팔비(三頭八비)의 아수라(阿修羅)와 춤과 노래를 잘 부른다는 건달바(乾達바)는 언제나 같은 면에 짝으로 등장한다. 팔부신중은 고려 초기까지 이어지다 탑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필요성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우리 나라에 팔부신중상이 조각된 탑은 서산 보원사터 오층석탑의 기단부, 그리고 군위 지보사 삼층석탑의 팔부신중상은 특히 서면의 아수라상이 만점 조각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리고 공후(공후)를 연주하는 건달바 조각은 경주 최부자 집에서 출토된 상이 유일한데 지금은 이화여대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금당터 내외진 초석과 장대석

 

*계단 소맷돌

 

*석등 지붕돌

 

*금당터 초석

 

석탑의 조각에도 여러 가지 계보가 있는데 감산사지 삼층석탑과 같이 조각을 하지 않는 계보, 창림사터 삼층석탑과 같이 하층기단에는 조각을 하지 않고 상층기단에만 조각을 하는 계보, 장항리 절터 오층석탑처럼 몸돌에만 조각을 하는 계보, 그리고 원원사터 삼층석탑과 같이 기단부와 몸돌에 모두 조각을 하는 계보 등으로 문화가 획일적이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하게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2007. 7.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