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낙서문화권

구미 태조산 도리사(太祖山桃李寺)

蔥叟 2007. 7. 10. 06:00

구미 태조산 도리사(太祖山桃李寺)

 

   한국불교는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기틀은 해동불교의 초전지 선산의 도리사에서 부터 비롯된다. 묵호자로도 알려진 아도화상은 신라불교의 공인(법흥왕 15년 528년)에 앞서 눌지왕대(417~458)에 불교의 포교를 위하여 일선군(선산) 모례장자의 집에 머문 바 있다.

 

   실로 신라불교는 이 아도화상의 전교로 부터 시작된다. 아도화상은 모례의 집에 머물던 중 어느 겨울날 냉산 자락에 오색의 복사꽃과 오얏꽃이 눈 속에서 피어남을 보고 그 자리에 비로소 절을 창건하니 이가 곧 해동 최초 가람 도리사이다. 오늘날도 도리사와 이웃한 도개에는 아도화상이 포교의 전진기지로 삼았던 모례장자의 유허지가 있고, 집터에는 모례정이란 우물이 있어 당시 실상을 생생히 전해준다. 다소 장황하지만 삼국유사가 전하는 아도화상의 이야기를 적어본다.

  

*태조산 도리사 산문

 

*도리사 수선당과 설선당

   

*도리사 극락전

  

   신라본기 제 4권에 이런 말이 있다.


   '제19대 눌지왕 때 사문(沙門-머리깍고 불문에 들어가 도를 닦는 중)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에 오니 그 고을 사람 모례가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그를  편안히 있게 하였다.' 이 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의복과 향을 보내왔는데, 신라의 군신들은 그 향의 이름과 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묻게 했다. 묵호자가 이것을 보더니 말했다.

 

   "이것은 향이라고 하는데 태우면 향내가 진하게 풍기는데, 이는 정성이 신성한 곳에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신성은 3寶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태우고 축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왕녀의 병이 위중해서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고 축원하게 하니 이내 병이 나았다. 왕이 기뻐하여 예물을 후히 주었는데, 잠시 후 그의 간 곳을 알수가 없었다. 

 

   또 21대 비처왕때에 이르러 아도화상이 시자 세 사람을 데리고 역시 모례의 집으로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그는 이곳에서 몇 해를 지내더니 별다른 병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과 율을 강독하니 가끔 믿는 사람이 생겼다.

 

*극락전 벽화

   

*극락전 벽화

 

*극락전 벽화

 

   아도본비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며, 어머니는 고도령이다. 정시 연간(240-248)에 조위사람인 아굴마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령과 사통(私通)하고 돌아갔는데 이 때문에 아이를 가졌다. 아도가 다섯 살이 되니 그의 어머니는 그를 출가시켰다. 나이 16세에 위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이 강독하는 곳에 나가서 불법을 배웠다. 19세가 되자 다시 돌아와 어머니를 뵈니 어머니가 말했다.


   "이 고구려는 아직까지도 불법을 모르지만 앞으로 3천여 달이 되면 신라에서 성왕이 나와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나라의 서울에는 일곱군데의 가람터가 있는데 하나는 금교 동쪽의 천경림이요, 둘째는 3천의 갈래요 셋째는 용궁의 남쪽이요, 넷째는 용궁의 북쪽이요 다섯째는 신유림이요, 여섯째는 사천의 끝이요, 일곱째는 서청전이다. 이것은 모두 전불(前佛-석가모니 이전에 성불한 부처)때의 가람터이니 불법이 앞으로 길이 전해 질 곳이다. 그러하니 너는 그 곳으로 가서 대교를 전파하면 마땅히 불교의 개조가 될 것이다."

 

*극락전과 석탑

 

*태조선원

   

*태조선원

  

   어머니의 가르침을 들은 아도는 계림으로 가 왕성 서쪽마을에 살았는데 지금의 엄장사이며, 때는 미추왕 즉위 2년 계미(263)였다. 아도가 대궐로 들어가 불교를 전하기를 청하니 당시 세상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라 이를 꺼리고,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는 자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으로 도망가서 숨었다. 미추왕 3년에 성국 공주가 병이 깊어 무당과 의원의 효험도 없자 칙사를 보내 사방으로 의원을 구했다. 이에 법사가 급히 대궐로 들어가 공주의 병을 고쳤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의 소원을 묻자 법사는 대답했다.


   "빈도에게는 아무런 청도 없사옵니다. 다만 천경림에 절을 세워서 불교를 크게 일으켜 국가의 복을 빌 수 있기만 바랄 따름입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여 공사를 일으키도록 명령했다. 그 때의 풍속은 질박하고 검소하므로 법사는 모옥을 지어서 살면서 불법을 강연하니 간혹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졌다. 그래서 그 절을 홍륜사라고 이름했다. 모록의 누이동생은 이름이 사씨인데, 법사에게 와서 중이 되어 역시 삼천기에 절을 짓고 살았다. 그 절을 영흥사라 했다.


   얼마 후에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법사를 해치려 했다. 그래서 법사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든 후 그 속에서 문을 닫고 자절하여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리하여 불교도 또한 폐해졌다.


   제23대 법흥대왕이 소량(중국남조의 양나라) 천감 13년 갑오(514)에 왕위에 올라 불교를 일으키니 미추왕 계미(263)에서 252년이나 된다. 이로 보면 고도령이 말한 3천여달이 맞았다 할 것이다.
 

<삼국유사 아도기라(阿道基羅)조>

 

*도리사 편액

  

*태조선원 편액

 

*편액

 

   하지만 도리사에서 아도화상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도리사는  절로부터 4.5km 떨어진 길목에 세워져 있는 산문으로 부터 시작된다. 도리사 산문은 팔작지붕 일주문 형식의 13평 크기 건물이다. 편액은 '해동최초가람태조산성지도리사(海東最初伽藍太祖山聖地桃李寺)'라 하였다.

 

   주차장을 지나 도리사에 들어서면 수선당과 설선당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ㄱ자 형태서 마주 서있다. 수선당과 설선당은 각각 112평과 140평의 2층 건물로 불자들의 신행 및 종교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쓰인다. 이들은 1994년과 1998년 신축되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15평 크기의 건물이다. 17세기에 건립되어 고종 12년(1875) 용해화상이 중수하고 이듬해 단청을 올린 도리사의 중심 불전이다. 안에는 1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고종 13년(1876)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신중탱화와 지장보살탱화가 모셔져 있다.

 

   태조선원은 정면 7칸, 측면 8칸의 ㄷ자형 건물로 50평 크기이다. 도리사가 선원을 운영하던 지난날에는 해동의 선객들이 "제일도리"라 할 정도로 이름난 선방이었으니, 태조선원은 그때의 모습을 전하는 건물이다.

 

*도리사 석탑

  

*석탑 상륜부

 

*석탑 상륜부

 

   도리사 석탑은  극락전의 앞뜰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탑으로 높이 3.3m 이다. 일반적인 석탑과는 전혀 그 형태를 달리하는 특이한 모습이다. 지면 위에 10매의 길게 다듬은 돌을 놓고 그 위에 탑의 기단부분을 세웠다. 기단은 사면에 네모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각면에 직사각형의 판석 6~7매를 병풍처럼 둘러 세웠고 남면 중앙부에는 문짝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분은 3중으로 각층마다 작은 석재를 중첩하여 얽거나 짜서 탑신부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벽돌탑을 모방한 모전석탑 계열에 가깝다. 조각 양식과 돌 다듬은 수법 등으로 보아 건립연대는 고려시대 중엽으로 추정된다.

 

*적멸보궁

  

*적멸보궁 사리탑

 

*적멸보궁에서의 조망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평 크기이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기도처이다. 1977년 절의 동쪽에 있던 석종형 부도를 경내로 옮겨 모시던 중 금동6각사리함(국보208호)과 함께 수정처럼 맑은 사리 1과가 발견되었다. 이에 적멸보궁을 창건하고 사리탑을 세워 발견된 사리를 영구히 안치했다. 뿐만아니라 조리사 중건 10주년 계획을 세운 다음 극락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을 중건, 중수하여 사역을 크게 일신하였다. 적멸보궁의 사리탑은 높이 약 8m에 달하는 웅장한 보탑이다.

 

*세존사리탑

  

*세존사리탑

 

*좌선대

 

   세존사리탑은 조선시대의 사리탑으로 석종형의 부도이다. 도굴꾼에 의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던 것을 경내로 옮겨 세우면서 금동육각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좌선대는 아도화상이 앉아 좌선하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바위로 윗면이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다.

 

   아도화상 사적비는 1655년(효종 6)에 세운 것으로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한 사적을 적은 것이며, 배면에는 자운비가 음각되어 있다. 대석은 자연석이며 전면에는 쌍룡, 후면에는 4룡을 조각하고 그 사이에 운용을 조식하여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불답시주질비는 도리사에 불량답을 시사한 시주와 전답량을 기록한 것으로 1712년(숙종 38)에 세웠다. 비의 전후면에는 양각한 연봉과 줄기가 조각되었고, 좌우측면세는 2단의 원조대가 있다. 그리고 정상의 중앙에는 보주가 새겨져 있다. 이 비는 승통 능철의 주관하에 조성되었으며 석수 김성원이 글자를 새겼다.

 

*아도화상 사적비

  

*불답시주질비

  

 

 

<2007.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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